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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

여자

by 황옹졸

신안군 자은면 백산리는 요즘은 대파 산지지만 전엔 마늘이 주 작물이었다. 마을 온 땅에 마늘이 심어져 있어 겨울에도 초록 세상이었다. 열 살 때부터 밭에 불려 다녔다. 추석쯤 한 톨 한 톨 땅에 심어 봄엔 쫑을 뽑아 주어야 한다. 초여름에 접어들면 일일이 호미로 캐고 널어 말려 하나하나 대를 잘라 망에 담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고개를 처박고 땅만 보고 하는 일이다. 땅을 사랑했는지 마늘을 사랑했는지 허리와 고개를 수그리고 평생을 산 할머니의 몸은 'ㄱ' 되었다. 맛있고 꽃도 피는 사과나 복숭아를 키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나무에 달려 있으니 하늘을 보아야 할 것이고 손에 흙이 덜 묻을 것이다. 왜, 누가 마늘을 먹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땐 매운 김치와 알싸한 마늘장아찌는 입에 맞지 않았다.


남편은 어려서 편식이 심했는데 특히 생선이 없으면 밥을 못 먹을 정도였단다. 젓갈에 붙은 파리한 살점이라도 있어야 한술 넘겼다고. 비린 것을 밝히니 섬 여자한테 장가들라는 말을 어른들이 자주 했다고 한다. 주문이 통했는지 나를 만났다. 전남 신안군 자은면. 나는 섬에서 나고 자랐다. 산골 사람보다야 생선을 많이 먹긴 했겠지만 푸지게 있는 건 아니었다. 바다가 가까워도 고기는 귀했고 우리 집은 물에 들어갈 남자가 없어서 더 그랬다. 마늘만 흔했다. 결혼하고 첫 명절에 친정에 다녀와 본가에 가니 무슨 생선을 얼마나 먹었는지 궁금해하셨다. 그 섬은 물고기는 없고 마늘 대파만 지천이라며 남편이 웃었다. 어머니는 “마늘?”하며 놀라셨다. 남편 고향은 군산 주변 시골인데 밭이 없고 대부분 벼농사를 짓는다. 논 옆 작게 땅을 일궈 작물을 심는데 마늘은 잘 안 된다고 했다.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맑게 웃으며 마늘을 부탁하셨다.


어머니는 여기저기 소문을 냈다. "우리 며느리 말이야, 신안 알지? 거기 태생이잖어. 그 동네 마늘이 겁나게 좋아." 맘씨 좋은 어머니는 친척들과 마을 아주머니들 것까지 해마다 스무 망이 섬에서 올라온다. 그 사이 마늘 사랑이 지극했던 할머니는 돌아가셔 섬 고모한테 연락한다. 마늘을 처음 사던 해에 고모가 까막눈인 걸 알았다. 택배 받을 주소를 말하려는데 고모부가 와야 한다며 전화를 급히 끊었다. 다시 하니 아직 고모부가 아직 안 왔다고 한다. 나는 바쁘다고 고모가 받아 적으라고 재촉했다. "으짜까 선영아. 미안하다야, 고모가 여적 글을 못 배웠어야." 입이 붙어 정적이 흘렀다. 속을 겨우 진정시키고 뭐 그런 게 미안할 일이냐며 짜증을 섞어 대답하고는 끊었다. 한글 배우는 일까지 미루는 지경으로 마늘을 사랑한 여자가 또 있었다. 고모도 고모부도 여든을 넘어섰다. 어려운 영어 아파트 이름도 척척 받아 쓰던 고모부가 이제는 몇 번씩 다시 물어본다. 동호수, 전화번호가 정확한지 몇 번씩 확인하느라 통화 시간이 30분을 넘었다.


어려서 궁금했던 마늘 많이 먹는 사람은 우리 어머니였다. 올해도 섬에서 올라온 마늘을 대견하게 바라본다. 그리고는 몸을 부산히 움직여 큼지막한 빨간 대야에 마늘을 쏟는다. 거기에 물을 몇 바가지 쏟아붓고 껍질이 불어나면 한 다리를 개고 앉아 마늘 까기를 시작한다. 한정 없는 시간이 가게 버려두면 몸통과 고개가 점점 밑으로 수그러져 어머니가 빨간 고무통로 빠질 것만 같다. 혼자 먹자면 이런 수고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저 마늘은 철철이 색다른 김치와 반찬 속에 들어가 당신의 사랑인 자식들 냉장고 한 켠에 머물 테지.


6월, 마늘을 먹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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