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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Mar 27. 2024

이유는 환절기

사랑은 그냥



진달래가 예뻐서 한아름 꺾었다. 찬장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내 수돗가로 가져가 깨끗이 씻었다. 꽃가지를 가지런히 모으고 길이를 맞춰 잘랐다. 아홉 살이 보기에 가장 예쁜 모양으로 꽂아 방에 두었다. 할머니가 보고 웃는다.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어제와 조금 다른 낯이다. 힘들어 보인다. 학교에서 돌아와 곧장 꽃병한테로 갔다. 꽃도 죽어? 그냥 숲에 둘걸. '죽여서 미안해'라고 중얼거리며 쪼그리고 앉아 울었다. 할머니는 뭔 지랄이냐며 대밭에 진달래를 내던졌다. 아파 학교에 못 갔다. 하나님이 벌을 준다고 생각했다. 아마 환절기라 감기에 걸렸으리라. 나는 아홉 살 때부터 꽃을 싫어한다. 마음 설레게 해 놓고 무심히 가버리는 그 천성이 밉다. 지고 나서 초라한 모양새는 정말 안 보고 싶다.



강의실 밖 벚꽃이 흐드러진다. 바람까지 살랑여 교수님이 말이 무척 지루하다. 뒷벽에 높이 걸린 시계로 고개를 올렸다. 시간을 확인하고 내려오는 길에 그 애와 눈이 마주쳤다. 가늘고 긴 눈매에 옅은 갈색 눈동자다. 고민이 많은가? 눈빛이 깊고 무겁다. 동아리 방에 걔가 앉아 있다. 말 한마디 붙이려고 다가가니 바쁘다고 급히 일어난다. 동아리엔 왜 들어왔는지 정기 모임 때도 다 파하는 마당에 얼굴만 잠깐 비췄다. 쟨 뭐가 저렇게 바쁘냐고 핀잔을 했다. 저쪽 모서리에 앉은 선배가, 등록금이고 용돈이고 다 자기가 버니 대단한 놈이라고 말한다.



매미가 시끄럽게 하던 날, 메일이 왔다. "나 너 좋아해." 답을 보냈다 "응, 그러렴." 계속되는 문자와 메일엔 답은 안 했지만 그 눈빛은 즐겼다. 깊고 무거운 갈색 눈이 끈덕지게 나만 따른다. 은행잎이 샛노랗길래 메일을 보냈다. "너 나 왜 좋아해? 답이 왔다. "그냥. 좋은 데 무슨 이유가 있어." 심각한 눈과 다르게 대답이 가볍다. 그래, 사랑은 그냥이지.


 

눈이 내린다. 스웨터를 선물했다. 좋은 걸 사려고 받은 용돈과 아르바이트한 돈을 아꼈다. 그 앤 그걸 손에 들고 화를 냈다. 자기 때문에 내가 힘든 게 싫다면서. 나도 화를 냈다.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목련이 봉오리를 오므리고 있던 날, 강의실 밖으로 나를 불러냈다. 무엇을 감추었는지 뒷짐을 지고 있다. 납작한 상자 하나를 내민다. 받아 열었다. 까만 지갑이다. 앞면에 작은 꽃이 잔뜩 박혀 있다. 아, 내가 말을 안 했던가, 꽃을 싫어한다고. 이걸 준비하려고 그 애가 치렀을 수고에 속이 아프면서도 좋았다. 고맙다고 말하고 받은 걸 물렸다. 또 아파 학교에  못 갔다. 환절기라 감기에 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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