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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코치 Jan 28. 2019

#16 여인과 하녀

거절이 힘든 상대를 만났을 때

  마을 5일장은 언제 와도 시끄럽고 지저분하다. 자꾸 나에게 말 거는 동네 아낙네들과 얽히는 것도 싫다. 살만한 물건이나 빨리 찾아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오랜만에 동네 마을장에 나선, 서쪽 끝에 살고 있는 나이 든 과부는 사람들의 관심이 귀찮고 성가시다. 반면에, 과부를 따라나선 하녀 셋은 오랜만에 반가운 동네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싶은데, 주인 마나님 성화에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고 있다. "저 수탉이 암탉보다 훨씬 싸니까 저걸로 한 마리 달라고 하세요." 제일 나이 어린 하녀에게 소곤소곤 귓속말로 지시했다. 하녀는 닭 주인에게 요청했다. "저기요~ 저기 닭 볏이 살짝 연한 빨간색 저 수탉이요. 네, 맞아요. 그걸로 주세요."


  서쪽에 외진 산기슭에서 살고 있는 과부는 남편을 잃은 지 어언 10년이 훌쩍 넘었다. 남편은 아테네에서 무역으로 제법 돈을 모았는데, 그만 몸이 나빠져 산골 마을에 요양차 오게 되었다. 그러다, 서쪽 산기슭에 살고 있던 이 여인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됐다. 동네 사람들은 돈 많은 아테네 남자와 결혼한 이 여인을 부러워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남편은 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일찍 떠났다. 여인은 물려받은 유산이 제법 되어 산골 마을에선 큰 어려움 없이 지낼만했다. 다만, 동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 이웃들과 담쌓고 지낸 지가 제법 오래다. 자식은 없어서 남편이 있을 때부터 일을 돕던 하녀 셋과 살고 있다.


  막내 하녀는 마을 장터에서 나오면서 주인에게 말했다. "마님, 저는 동쪽 끝에 그 도살장 가서 수탉을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여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한마디 했다. "아니 돈 주고 수탉을 사서, 또 돈 주고 도살을 하겠다고요? 그렇군요. 닭이 무서워서 못하겠시겠다는데 제가 그냥 할게요. 나도 동물을 죽이는 게 너무너무 싫지만, 하녀들이 못하겠다는데 내가 할 수밖에 없죠." 막내 하녀는 손사래를 치며 다시 말했다. "아닙니다. 마님, 제가 하겠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바로 물을 끓여놓겠습니다.", "뭐 정 그러시다면 알아서 해주세요. 닭고기는 연하게 삶아주시고요." 다시 여인은 고상하게 하녀에게 한마디 하고 도도히 길을 걸었다.   


  집에 도착하자 막내 하녀가 푸드덕 거리는 닭날개를 붙잡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나이가 제일 많은 하녀가 살짝 일러줬다. "아직 닭 잡지 마! 아마 오늘 삼계탕은 어려울 거야. 내가 아까 장터에서 우리 주인 남자 친구를 우연히 목격했는데, 우리 보니까 갑자기 생선 가게 뒤로 숨더라고.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거지. 아마 오늘 안 올 거야. 내 오랜 경험을 토대로 볼 때..."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여주인이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와서는 "수탉 아직 안 잡았지요? 그냥 뒤뜰에 묶어놓으세요. 오늘은 입맛이 영 없네요." 말하고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마 남자 친구가 계속 연락이 안 되어 신경질이 났나 보다. 덕분에 하녀들은 잔소리 걱정 없이 오손도손 모여 마을장에서 구입해온 물건들을 정리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아직도 어둑어둑한 새벽 5시. 우렁찬 수탉 소리가 집 안 구석구석을 파고든다. 여주인은 수탉 소리를 듣고 눈이 뜨였다. 오랜만에 5시에 일어나 본다. 코로 들어오는 새벽 공기가 알싸하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몸의 세포가 하나하나 깨어나는 듯하다. '역시 자연의 소리를 듣고 눈을 뜨니 하루 시작이 가뿐하구나!' 여주인은 아래층에 내려가 하녀들을 깨웠다. "오늘 새벽 공기가 무척 상쾌해서 깨웠는데 다들 피곤한가 보네요. 어제 특별히 일한 것도 없을 텐데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피곤하면 다들 좀 더 자요. 난 어쩔 수 없이 일어났으니 혼자 아침 준비나 해야겠네요." 하녀들은 잘 안다. 여주인이 이렇게 나올 때 곧이곧대로 들으면 얼마나 피곤해지는지를. 뒤끝 있는 스타일이라 바로 대응해줘야 한다. "마나님, 마침 저희도 어제 장 본 거 정리도 할 겸 일찍 일어나려고 했습니다. 자~ 자~ 다들 일어납시다." 제일 나이 많은 하녀가 다른 하녀 둘을 서둘러 깨웠다.   


  최근 며칠 동안 여주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 남자 친구가 젊은 애인이랑 바람이 나서 아테네에서 무슨 공연을 준비하느라 바쁘다고 동네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데, 정작 그 여주인만 마을 사람들과 왕래를 하지 않아 아직 그 소문을 듣지 못했나 보다. 덕분에 수탉은 아직까지 멀쩡히 살아있다. 여주인은 연락이 안 되는 남자 친구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는데, 그나마 새벽에 울어재끼는 수탉 덕분에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명상을 시작했다. 명상을 시작하니 몸도 머리도 한결 가벼워져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듯했다. 여주인은 이 좋은 기운을 하녀들에게도 나눠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매일 새벽 5시. 하녀들을 깨워 다 같이 새벽 명상으로 하루를 열었다. 하녀들은 비상이 걸렸다. 안 그래도 깔끔쟁이 여주인 때문에 매일 청소하고, 빨래하고, 집 관리하느라 피곤해 죽겠는데 새벽에 일어나려 하니 죽을 맛이었다. 하녀들은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모여서 대책회의를 열었다. "예전에 남자 친구가 오면 집안일에 좀 소홀해도 별 관심도 없고 가끔 둘이 여행도 떠나서 좋았는데, 요즘 너무 힘들어요. 새벽 명상만 없어도 살겠어요. 대장 언니가 그 여자한테 앞으로 새벽에 모여서 명상하는 거 힘들다고 말 좀 해줘요.", "얘는 그걸 왜 나한테 시키니? 저 수탉은 원래 네가 잡는 거였잖아. 그럼 네가 해결해야지.", "아니, 언니가 중간에 말려가지고 내가 안 한 거잖아요. 아니 저 수탉은 무슨 서커스에나 보내버리든지 해야지. 내 평생 저렇게 크게 우는 수탉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조용히 듣고만 있던 둘째 하녀가 말했다.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요. 그냥 오늘 밤에 몰래 수탉을 멀리 풀어놓는 건 어때요? 우리 손에 피 묻히는 건 좀 그러니 산속에다 놓고 오죠.", 다음날 새벽 5시. 여주인은 평상시보다 더 일찍 눈이 뜨여서 닭 우는 소리를 기다리는데 5시가 넘어도 잠잠했다. 이상해서 나가보니 수탉이 안 보이는 게 아닌가! 여주인은 차마 하녀들을 의심하지는 못하고 집 밖에 수탉을 내놓은 본인을 자책했다. 그다음 날 새벽 4시. 이제 여주인은 일찍 일어나는 게 어느새 익숙해진 건지 수탉의 울음소리가 없어도 1시간이나 일찍 눈이 저절로 뜨이기 시작했다. 새벽 4시에 하녀 방에 방문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한다. "미안한데 어제 내놓은 쟁반이 그게 어디에 있더라?, 일찍 일어난 김에 추운 주방에 가서 혼자 정리나 해야겠다. 아냐, 아냐, 그냥 더 자세요. 근데 그 쟁반이 혼자 들기 좀 무겁긴 하던데..." 하녀들은 후회가 밀려왔다. 차라리 오전 5시 기상이 그나마 행복했다. 오늘도 꾸벅꾸벅 졸면서 하루를 시작하겠구나!     



  

  주변을 둘러보면 얼굴 붉히면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이상한 논리로 본인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사람들이 많다. 손아랫사람이거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일 경우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보통 이런 일로 갈등을 겪게 되는 상황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의견을 가장한 지시를 받아야 하는 위치일 때다. 차라리 고압적으로 지시하는 막무가내 직장 상사라면 주변 사람들이 함께 욕이라도 해줄 텐데, 정중한 모양새로 상대방을 위하는 것처럼 포장하지만 실상은 본인을 위한 활동으로 호의를 베푸려는 사람들에게 거절을 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우화 속 여주인과 같이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힘들게 새벽부터 준비했는데."라고 시작하면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보통 이런 경우 상대방은 자발적인 참여, 자발적인 봉사라고 주장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본인의 목소리를 내는 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다양한 꾀를 생각해 낸다. 하지만, 일을 쉽게 가려다 오히려 더 큰 어려움에 부딪칠 수 있다. 부당한 요구에 대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부당하고 무리한 요구더라도, 이를 똑같이 편법으로 대응하다 보면 그 부당함에 대응하는 힘이 약해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악을 악으로 대응하다가 더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고,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로 뒤바뀌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그래서, 두 가지 포인트를 이야기하고 싶다. 왜 우리는 거절을 잘 못할까? 그렇다면, 거절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국내에서 엄청난 화제를 낳았던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를 보면 거절을 못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잘 정리되어 있다. 칭찬에 항상 굶주려 있고, 모든 사람에게 적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행여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생각으로 마음이 계속 불편하다. 이 책에서 주요하게 나온 개념이 바로 '과제의 분리'다. 과제의 분리란 내 판단대로 행동하되, 그 반응에 대한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은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의 과제라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내 자유를 억압하면서까지 노력하지 말고, 타인의 인정에 자유로와지라는 메시지가 이 책의 주제다. 물론, 미움을 받으면 직장 생활이 피곤해질 수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은 미움을 받을 걸 감수하라는 말이 아니라, '남의 눈치'에서 자유로와지라는 말이다. 나 역시 할 말은 다하지 못하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있는 편이라 살아오면서 감정적/물질적 손해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지금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학습하며 노력 중에 있지만 쉽지 않다.


  그렇다면, 여전히 노력하지만 쉽지 않은 과제. '거절'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거절 관련해 구체적인 배경과 실제 적용 방법까지 자세하게 정리된 '나는 왜 싫다는 말을 못 할까/김호 지음/위즈덤하우스)'를 적극 추천한다. 이 책에서 다룬 '거절 방법'을 몇 가지 정리하면 이렇다.


1. 이유와 함께 거절하기

상대방에게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 타당한 이유를 제시한다. "마님, 제가 고혈압이 있어서 겨울철에는 새벽 일찍 일어나면 건강에 문제가 생깁니다. 5년 전에도 새벽에 계속 일이 있어서 나가다가 쓰러진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의사도 새벽은 피하라고 말을 했습니다", "상무님, 제가 오전엔 정기적으로 업계 모니터링 분석을 하고 있어서 말씀 주신 뉴스레터를 제가 담당하기엔 어려움이 있습니다."


2. 대안을 제시하면서 거절하기

상대방의 요청을 전부 수용하지는 않고, 그중 일부를 선택해 대안을 제시하는 방법이다. "오전 5시 기상은 어렵습니다. 대신 매주 토요일 오전에 '새벽을 여는 수탉 명상 프로그램'을 공개적으로 열어보는 건 어떨까요?", "상무님, 제가 업계 모니터링 분석을 뉴스레터를 맡을 담당자에게 공유하는 방법은 어떨까요?"  


3. 관심이나 동의, 협조의 뜻을 보이며 거절하기

상대방이 요청한 사안이 나도 관심이 있고, 동의하고 참여하고 싶으나 상황상 거절하는 방식이다. "마님, 안 그래도 요즘 명상에 대해 저도 관심이 있는데요. 몇 가지만 조정해 주신다면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상무님, 뉴스레터를 새롭게 보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건 저도 100% 동의합니다. 다만, 몇 가지 업무 조정이 있어야 제가 맡고 있는 일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 감사의 뜻을 표현하며 거절하기 

상대방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하면서 정중하게 거절하는 방식으로, "저희 건강을 생각해 제안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희가 매일같이 오전에 준비하는 일이 있어서 마님이랑 같이 명상을 할 수 없겠네요.", "상무님, 새로운 프로젝트에 저를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다른 업무를 하고 있어서 아쉽지만 어렵겠습니다.”


거절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커뮤니케이션 기술이다. 직장에서 ‘미움’을 감수할 만큼 용기를 낼 필요가 있을지는 상황을 보면서 고민해봐야겠지만, 우리가 용기를 낸 다수의 ‘거절들’이 그리 미움받을 일은 아니란 걸 기억했으면 좋겠다.


주인 남자 친구는 장터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궁금하시면 아래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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