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spotlight
아카데미영화제 작품상을 받은 영화 스포트라이트를 보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는 것, 그것이 보스턴글로브의 카톨릭 사제단의 아동 성추행 보도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인지한체로 영화를 보았다. 단순히 사회와 시대의 권력 비리를 파헤치는 언론의 통쾌하고 극적인 스토리 일거라고만 생각해서 인지, 기대 이상의 울림과 먹먹함이 있었다. 영화는 단순히 외국의, 특정 종교 권력층의, 소수의 아동 성애자들과 그를 둘러싼 특이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을 살고 있는 나와 우리의 이야기였다.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 받은 느낌은 숭고함이다. 첫째로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영화속의 언론인들, 기자들(특히 그것이 비극적인 이야기일 때)의 시선 때문이고, 두번째로는 스포트라이트 영화를 만든 제작자들이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 영화를 만든 목적과 그 태도 때문이다. 보통의 언론을 무대로한 영화에서 나오는 비리를 파헤치고, 권력을 향해 계란을 던지는 선으로서의 '멋진' 기자들과 지극히도 악한 권력층의 전형적인 고루한 묘사 보다 스포트라이트에는 담담한, 지극히도 현실적인 인물들이 나온다. 영화속의 기자들은 보스턴 출신이 아닌 '유대인'으로 굴러들어온 새 편집장에게 불편한 심기와 텃새(?)를 부리는 인간미(?) 넘치는 기자들이다.
아무리 현실과 실화를 담담히 영화화 했다 하더라도 '영화적' 스펙터클과 카타르시스는 어쩔 수 없다. 영화는 실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며 신부들의 몹쓸짓을 외면한 추기경과 기자들 그리고 수많은 카톨릭 신자들과 시민들을 이해할 수 없지도 모르지만 현실에서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일이다. 더러운 것을 보기 싫어하고, 불쾌한 상황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우리의 본성은 불편한 사실과 내가 믿고 있고, 믿고 싶은 것 외에는 외면하거나 회피하게 마련이다. 내가 다니는 성당의, 내가 존경하는 신부님이 한 아이를 살짝(?) 추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었을 때 보통은 사실을 거부하거나 그것을 받아들이더라도 본인만 간직한체 내면에서 삯히며 침묵한다. 혹은 가십거리로 활용하거나.
그것이 자연스러운 이유는 너무나 많다.
"내가 직접 그 상황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을 섣불리 얘기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와 신념에 연관된 문제라면 '불경스러운' 일들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내 가벼운 '입놀림' 때문에 작은 실수로 덮힐 수 있는 일들이 '괜히' 큰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99% 확신으로는 모자르다. 100%가 되어야 내 믿음과 신념을 바꿀 수 있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거룩한 침묵'이 답이다."
한 눈에 들어오는 글로 적어 놓으면, 참 비겁하고, 창피스러운 생각들이다. 하지만 소름끼치게도 이런 생각들이 오히려 모두를 위하고, 전체를 위한 일이라는 전제를 깔면 정당화되고, 심지어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입이 마르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것은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일어난 일과 영화의 스토리가 거울 속의 모습처럼 비슷했기 때문이다. 뉴스에서 남의 일처럼, 일부 불결한 목사의 일탈이 아닌,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아니, 단순히 성직자가 아닌, 정신적으로 존경하는 이의 정신적, 영적, 도덕적 타락을 직접 맞닥뜨렸을 때, 나는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머리로는 답은 정해져 있다.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고발하고, 세상에 소리쳐야 하는 것. 하지만 지극히도 상식적이고 당연한 일을 맞이하는 우리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내가 겪었던 경험만으로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진실을 다 알지 못하고서야 입을 놀리는건 위험한 일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거룩한 침묵'에 동참하기 쉽다. 고발하고 소리치는 것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이다. 불편한 사실을 끄집어 내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때로는 '침묵'의 미덕보다 '외침'의 용기가 더 어렵고 가치 있다.
영화는 카톨릭 사제들의 성적 타락과 조직적 은폐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그러한 불편한 사실을 밝혀내는 언론과 일부 기자들의 끈기와 숭고한 정신을 담담히 앵글에 담아 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이들은 어떻게 피해자들이 저렇게 울부짖는데, 조직적으로 성직자들이 십수 년 동안 추행을 해왔는데, 그것에 대해 침묵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미첼 개러비디언(스탠치 투치)이 남긴 말과 가해자들의 편에 서서 침묵한 이들이 남긴 말이 그 답이 될 수 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지만, 한 아이를 학대하는데도 온 마을이 필요하다' (피해자 변호사의 말)
'교회는 좋은 일을 많이 한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교회가 필요하다. 세상을 위한다면 더는 알려고 하지 마라.' (침묵한 이들의 말..)
마틴 루터킹 목사는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었다.' 라고 말했다. 그것은 거룩한 침묵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비극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를 말해 준다. 소름끼치는 비극을 막기 위한 용기 있는 고발과 외침의 첫 걸음은 '공감' 이다. 불편한 사실과 진실을 외면하기 보다 직면하여 피해자와 약자의 비극을 '공감' 하는 것. 사실 '공감' 하기 위해서는 '진실'에 대한 사랑과 그것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우선이다. 즉, '진실에 대한 존중' - '약자의 아픔을 공감' - '진실을 말하는 용기' 의 순서대로 우리는 진실을 대면하고 그것을 대해야 한다. '거룩한 침묵'은 넓은 길이고, 쉬운 길이다. 눈을 감으면 세상은 평온하고, 안경을 벗으면 세상은 아름다워 보인다. 적어도 '진실에 충실하고 존중' 한다면, 눈을 뜨고 더럽고 추악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에너지 그리고 좁은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정의로움, 사랑이 있어야 한다.
영화 스포트라이트를 보면서, 가해자 편에서 거룩한 침묵을 하던 이들을 스크린으로 바라보았을 때야 비로소,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그것이 이슈 되었을 때 나는 그 때 가해자의 편에 서 있었음을 깨달았고, 부끄러웠다. 진중함과 무거움이 지극히도 가벼운 비겁한 모습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는 역설은 어떤 작은 진실에도 깨어 있어야 한다는 '거룩한 부담'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