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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Apr 16. 2017

영웅담이 통하는 시대,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2016

차별에 대해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에 대해 눈 뜨게 된 이후 일 것이다. 다름과 차이에서 오는 상하의 구분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개념은 인간으로서 반드시 존중받아야 하는 가치와 권리와 마찬가지로 불과 몇 백 년 전에서야 깨닫고 쟁취해왔다. 영화 <히든 피겨스>에서 처럼, 높은 빌딩에 냉장고와 크지만 컴퓨터까지 사용하던 1960년대의 미국에서조차 양반과 상놈이 구분되듯, 흑인은 백인과 구별되어 화장실을 쓰고, 심지어 커피 포트를 따로 써야만 했다. 흑인도 백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 동등한 인간이라는 개념과 사회 인식의 형성은 70년대나 되어서야 그나마 이루어졌으며, 2017년인 오늘날에도 사회 깊숙한 곳곳의 인종차별은 현재 진행 중이다. 여성에 대한 성차별 역시 다르지 않다.   


구별은 수평적이나, 차별은 수직적이다. 구별은 기능적으로 이루어지나, 대부분의 차별은 존재 자체에 기반한다. 인종과 성별과 신체의 장애여부 등 존자 자체로 다른 대우를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차별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차별할까?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심리적 요인은 '우월감'이다. 우월감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감정이다. 혼자만의 세상이 아니라면, 오로지 善으로만 가득 차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상대적 우월에서 오는 만족감은 가장 쉽고, 달콤한 행복으로 느껴진다. 오롯이 '나'로서, 타인의 영향을 벗어난 주체적인 '나'가 된다 하더라도, 그 주체성마저도 비주체적인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우월감으로 작용한다. 비교하고, 계층을 나누고, 위아래를 정하는 일은 그러한 만족감을 느끼기 위한 본능적인 의식이자 사고의 동기이다.


생산 수단 소유 여부에 따라 나뉘는 부자와 가난한 자. 지역에 따라 나뉘는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 피부색으로 구분 지어지는 잘 나가는 백인과 노예 출신의 흑인. 생물학적, 육체적 우위를 갖는 남자와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여자. 신체적으로 부자유한 장애인과 그렇지 않은 비장애인. 고용계약의 형태에 따라 다른 정규직과 비정규직. 나이와 세대로 구분 지어지는 어른과 아이. 청년과 노인. 그것이 어떤 기준에 의한 구분이든. 인간은 보편과 특수의 형태로 구분 짓는 본능이 있으며, 그것이 어쩌면 역사의 동력이 되기도 하고, 갈등의 동기가 되기도 했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가 다르지 않다.


남성 대비 사회적, 제도적으로 억압받는 여성과 그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운동인 페미니즘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남성이라는 보편과 여성이라는 특수의 갈등과 억압 그리고 그에 대한 항거는 과거에도 있었다. 페미니즘의 역사를 볼 때, 남성 중심의 사회에 여성이 참여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19세기에서 1950년 대의 페미니즘 운동이 그 시작이 아니다. 로마 공화정(기원전 약 500년) 때에도, 여성의 정치 참여에 대한 노력과 이야기가 전해진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단순히 여성의 성적 차별과 억압이 주요한 이슈가 아니다. 보편과 특수의 분류라는 인간 본성을 뛰어넘는 사회적, 환경적 인식의 변화가 있었다. 과거에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백인이 흑인을 지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보편의 힘과 논리에 의해 특수가 희생당하는 것은 그것이 보다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본성을 거슬러, 그 보다 더 윤리적이고, 당위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인류는 노력해 왔다.


이제는 더 이상 부자가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다. 백인이 흑인 위에 있다는 생각은 원숭이 수준의 교양과 사고라고 생각한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고, 상대적으로 더 가치 있다는 무의식의 인식은 쓰레기 같은 생각이 되었다.  



그렇다고 완전한 남성과 여성의 평등한 세상이 되었는가.라고 물었을 때, 시원하게 '그렇다' 라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백인과 흑인이 동등한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머리와 가슴 한 켠에는 백인이 흑인 위에 있고, 부자가 가난한 자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으며, 아프리카 우간다 시골 마을 소년보다는 런던 윔블던의 베컴 주니어가 더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무의식적으로, 사회 근원적으로 여성은 특수의 영역에 있다.


이제 문제는 무의식과 환경적 특수를 없애는 일이다. 그저 몇몇의 사례로는 이제 부족하다.
그런 점에서 히든 피겨스의 영웅담은 통쾌한 만큼 슬프다. 특수가 보편이 되기 위해서는 천재가 되거나, 1등이 되어야 한다. 물론 영화 속  캐서린 존슨 (타라지 P. 헨슨 분), 도로시 본(옥타비아 스펜서 분),  메리 잭슨(자넬 모네 분)은 유능하고, 위대한 영웅이다. 하지만 60년 전의 일을 이제서야 이야기하고, 그런 스토리에 아직도 감동한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이 차별에 있어서 느리게 변화했으며,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영웅담이 통하는 것은 그것이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회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캐서린 존슨)를 위해 유색인종 화장실을 없애는 케빈 코스트너(알 해리슨 역) 같은 상사 보다, 의식에서부터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게 보는 상사가 많은 사회다. 드러나는 차별에 대한 저항 보다, 보이지 않는 차별을 없애는 것이 더 어렵고, 중요하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영화 <히든 피겨스> 시대로부터 40여 년 전, 버지니아 울프는 그 당시 남성들에게 당연하고, 지금의 여성들에게도 당연한 '자기만의 방'과 '500파운드'가 없는 여성의 부당한 현실과 억압, 차별에 대해 시니컬한 썩소를 남겼다. 미래에 당연한 '무의식으로서의 평등' 인식이 없는 오늘날의 시대에, 수많은 특수의 영역에서 많은 여성들이 썩소를 남긴다. 히든 피겨스와 같은 영웅담이 통한다는 것은 지금이 아직도 21세기 '자기만의 방'의 시대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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