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잊혀지는 게 두려우니,
죽을 때까지 영화에 나를 기록해 달라!”
폐암 말기 선고를 받은 강덕경 할머니의,
마치 유언과도 같았던 간절한 "요청"과 "의뢰"로-
갑작스레 <낮은 목소리2> 작업이 시작 되었기에..
우리는 '선 조치, 후 수습' 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다고, (할머니의 건강 상태를 고려했을 때)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상황도 결코! 아니었던 지라-
그때는 정말, 몸도 마음도..
더 많이, 급하고 분주했던 것 같다.
다행히, 장비는.. <낮은 목소리>를 촬영했던,
오가와 감독님의 카메라와 녹음기가 남아 있었고..
급박하게 꾸릴 수밖에 없었던 스탭도,
가능한 한 <낮은 목소리>에서 이어지며..
촬영 보조였던 종구 형이,
촬영 기사로 승진(?!)을 하는 걸로..
녹음 기사였던 호준이 형이,
녹음과 동시에 조감독까지 맡아서 하는 걸로..
바리터 시절에 영주 언니와 같이 일했던,
명화 언니가 스크립터를 하는 걸로..
내 대학 동기인 정례가,
기획팀으로 합류하는 걸로..
소식을 듣고, 자원해서(?!) 먼저 찾아온-
운영 언니가 연출부를 하는 걸로..
소개를 받은 중앙대 사진학과 여학생이,
현장 스틸을 맡는 걸로..
(스틸을 맡은 여학생의 얼굴은 생각 나는데,
이름이 도저히 기억 안 난다;;; ㅠㅠ)
대단히 운 좋게!! 착착.. 스탭들이 꾸려졌다.
"바리터" 는,
1989년에 결성되었던 '여성 영화집단'으로..
<파업전야> <오! 꿈의 나라> <닫힌 교문을 열며>
등의 민중 영화를 만들었던, "장산곶매" 출신의-
여성 영화인들이 추축이 되었는데..
("바리터" 는.. '바리 공주' 에 관한,
고대 설화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첫 번째 영화였던,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 는..
‘여성 민우회’ 라는 단체로부터,
영화 제작 의뢰를 받아서 만들었던-
사무직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극영화 였고..
이후로도, <가자, 이 땅의 여성들아>
<우리네 아이들> 등의 작품들을 만들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1991년.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바리터" 는, 멤버가 모두 여성이기도 했지만..
여성의 시선으로! 여성이 주체적으로!!
(모든 기술직까지 자처 했는데.. 그때,
영주 언니는 직접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했다)
소외된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관객이었던 여성들을 향해 만들었으니..
'여성 영화' 에 있어서는,
그 토대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주 의미 있는 영화 집단이었고!!
비록 "바리터" 는 사라졌으나,
그 정신이.. 영주 언니를 매개로, 우리의-
‘기록영화제작소 보임’ 으로까지 이어져왔기에..
<낮은 목소리> 작업을 하는 내내-
"바리터" 출신의 멋진 선배 언니들로부터..
지속적으로, 아주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 같다.
그 때.
우리의 <낮은 목소리> 작업에 도움을 줬고,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바리터” 출신 선배 언니들은.. 다음과 같다.
@ 김소영 (영화감독/ 영상원 교수)
@ 도성희 (북경대 영화과 박사/ 프로듀서)
@ 김선아 (前 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
@ 홍효숙 (서울영상집단/ 부산영화제)
@ 김 영 (영화 프로듀서)
@ 임혜원 (영화 프로듀서)
그 시절을 회상하며,
지금도 현장에서 맹활약 하고 있는..
모든 여성 영화인들의 건투를 빌어본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