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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만복 Jul 01. 2022

추억이 내리다

백세 번째 시

맞아 그때도 이렇게 비가 내렸지

너와 나는 나란히 비를 맞으며 기억을 꺼냈다

비가 내리는 시간만큼 우리의 이야기는 참 짧았고

나는 담배를 꺼내 물고 너는 립밤을 다시 칠했다

길었던 계절들을 여러 번 접다 보니 금세 끝에 가까워지고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너와 나의 거리가 왠지 멀어져 갔다

그토록 달음질치고 싶었던 마음은 떠나버렸는데

이상하게도 미련이 걷다가 멈춰서 자꾸 뒤를 바라봤다

풋풋하고 어설펐던 나를 기억하는 사람을 보낸다는 일이

네가 아니라 마치 나를 떠나보내는 일만 같아서

그때 왜 그랬을까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겠지

사랑보다 무거운 게 자존심이라서 입술을 뗄 수 없었다

이윽고 비는 그치고 우리는 짧은 인사와 함께 멀어져 갔고

여전히 추억은 그치지 않고 더 세게 몰아쳤지만

우리는 혹시 모를 재회의 씨앗을 이 자리에 뿌려두고 떠났다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우리에게 그리고 이기적인 나에게

씨앗을 충분히 적실 눈물이 부족해 결국 피우지 못할 그 꽃을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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