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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만복 Jul 09. 2022

누가 '루디'를 만들었는가

박민규,『루디』

누구나 악마를 가지고 있다


박민규 작가의 <루디(현장 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2010)>를 읽고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이 떠올랐다.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 씨』, 『복수는 나의 것』 등 그의 영화에는 공통적으로 이것이 담겨있다. 바로 '복수(Revenge)'다. 이 소설에서도 그의 영화처럼 복수의 플롯이 깔려있다. 자신을 악마로 만든 세상에 복수하는 루디와 악마 같은 루디에게 복수하는 주인공. 그에게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결국 루디와 다를 바 없었던 주인공의 모습은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루디는 잔인하고 냉혈 하다. 남의 고통은 물론, 자신이 받는 고통에도 묵묵하다. 사이코패스 같은 그의 모습은 주인공의 평범한 일상을 엉망으로 만드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위기가 거듭될수록 주인공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악마성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주인공은 루디를 피해 도망갈 기회가 있었지만 복수를 하기 위해 달아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더 이상 공포가 아니었다. 오히려 광기에 가까웠다. 그리고 비로소 주인공은 바라던 대로 루디에게 복수를 성공한다.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나고 주인공의 심정은 어땠을까. 통쾌했을까. 무서웠을까. 아니면 흥미로웠을까.


사실 주인공은 백지장처럼 평범한 사람이다. 그는 뉴욕의 작은 금융회사의 부사장으로, 좋은 대학을 나왔고 기부도 자주 하고 세금도 잘 낸다. 그러나 루디는 다르다. 그가 어렸을 때 한 괴한에 의해 그의 주변 사람들이 모두 살해당했다. 홀로 살아남은 루디를 사람들은 '신의 아기'라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축복이 아니었다. 살아남았다는 것은 분명 기쁠 일이지만, 모두가 죽고 홀로 남았다는 것은 결코 행복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루디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했다. 루디가 주인공에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주인공의 고통이 없었던 것처럼, 루디 또한 그 괴한이 없었다면 지금의 루디가 없었을 것이다.


@Photo By Pexels, Pixabay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나는 악마성에 대해 고민했다. 분명 우리들의 마음속에서도 악마가 살고 있다. 다만 우리의 엄격한 통제에 따라 감금되어 있을 뿐, 루디 같은 자가 밖으로 꺼내 주기를 항상 고대한다. 그렇다고 이 악마가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누군가는 법의 심판을 받는 범법자가 되겠지만, 이것을 그림, 소설 같은 작품으로 만드는 사람에게는 대중들에게 예술가라고 칭송받으며 박수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이 악마성을 조금씩 표현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끝으로 <루디>에 등장하는 '러닝메이트'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란 마라톤과 같다고 말한다. 맞다. 우리는 모두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시작과 속도는 달라도 결승선은 모두 같다. 물론 1등은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는 명예를 얻겠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완주라는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 마라톤은 1등보다 완주가 더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1등이 아닌 완주를 목표로 느리게 달린다면 조금은 여유롭게 주변을 바라볼 수 있다. 또 함께 뛰는 사람들을 조금 더 배려하고 교류한다면 더 많은 러닝메이트들과 오랫동안 달릴 수 있다. 그러나 낙오의 공포가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앞선 사람들을 제치려고 안간힘을 쓴다. 어쩌면 악마성이란 이러한 공포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나보다 빠른 주자의 다리에 총을 쏘고 싶은 마음. 그렇다면 우리 안의 악마는 누가 만들었을까. 마라톤 같은 세상인가. 아니면 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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