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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만복 Jul 14. 2022

'물의 무덤'에서 깨어난 검은 말

김태용,『물의 무덤』

길들여지길 거부하는 검은 말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 살고 있다. 우물 안처럼 몹시 지루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틀에 맞춰 살아간다. <물의 무덤(현장 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2010)>에 등장하는 주인공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습관처럼 어머니의 요강을 비운다. 그런데 어느 날, 요강을 비우고 양치질을 하는데 사랑니 하나가 갑자기 '툭'하고 빠져버렸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작은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평범한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다.


사실 그의 하루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사랑니가 빠진 것 외에도 누군가 자신의 자동차 사이드미러를 박살 내버렸고, 출근하자마자 갑작스럽게 지방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묵묵히 평범하게 일상을 수행했다. 그렇다면 그는 평범한 사람일까. 그렇지도 않다. 그는 어떤 문제에 대면했을 때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컵라면'이라는 사소한 것에 큰 집착을 보일만큼 쓸데없이 고집스러웠다.


그랬던 그에게 '검은'말의 환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검은 말은 무덤을 파헤치며 날뛰었고 자신이 먹고 싶었던 컵라면도 자유롭게 먹었다. 여러 가지 문제들과 상황들을 평범하게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과는 달리, 검은 말은 자신의 소신대로 자유롭게 행동하며 모든 것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했다. 그렇다면 왜 그에게 검은 말의 환영이 보였던 것일까.


@ Photo By Photo-graphe, Pixaby


이 소설에서의 검은 말은 몽환적인 분위기만을 연출시키기 위한 장치는 아닐 것이다. 주인공에게만 보이는 환영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주인공이 이 검은 말을 단순히 환영으로써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이 검은 말은 늘 우리가 갈망하지만 제어하는 그것. 바로 욕망이다.


사실 주인공과 검은 말의 관계는 욕망과 그것을 억제하는 우리와 몹시 닮아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이 욕망은 자신도 모르는 새 밖으로 튀어나온다. 이 욕망을 얼마나 드러내느냐에 따라 우리는 겁쟁이가 되기도 하고, 모험가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 이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때 우리는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질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욕망이 평범한 일상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은 확실하다.


비가 내린다. 그동안 욕망을 절제해오던 그는 고장 난 차창 너머로 들어오는 비로 인해 온몸이 흠뻑 젖는다. 마치 물의 무덤으로 수장되는 모습이다. 그 과정을 통해 주인공은 진실한 죽음, 즉 절제된 욕망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껍데기는 물에 의해 묻혀버리고, 오로지 알맹이만 남은 욕망의 본모습으로 그를 집어삼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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