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 꽃다발

by 황만복

- 오늘은 좀 늦어요. 굶지 말고 저녁 먼저 먹어요.


아내에게서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오늘따라 문자의 내용이 유난히 마음에 걸렸다. 직장동료들과 맥주 한잔을 하고 들어온다니. 내용 자체로는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이상하게도 불쾌한 예감이 스며들었다. 그래도 의처증 있는 남편처럼 굴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문제가 생겼다면 확실한 증거를 포착해야 한다.


요즘 아내는 유난히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 같다. 틈만 나면 피부과에 다녀왔고, 친구들과의 통화에서 보톡스, 필러 같은 단어들이 오가는 것을 엿들었다. 결혼 8년 차, 연애까지 합치면 20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는 별 문제가 없이 지내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나 보다.


문득 아내와의 연애가 떠올랐다.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농구가방에 옷 몇 벌만 넣고 무작정 아내가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시작했지만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갑은 늘 가벼웠다. 그래도 당시 여자친구였던 아내를 위해 작은 이벤트를 많이 준비했다.


만난 지 100일이 되던 날, 안타깝게도 나는 그때 백수였다.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차비 몇 천 원을 받았다. 그 돈으로 100일 기념으로 아내에게 꽃을 사고 싶었다. 꽃집에 들어서자 꽃들이 자신을 고르라며 향기로 소리치고 있었다. 화려한 꽃들 중에서 유독 수선화가 눈에 들어왔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우아한 사람을 만난 듯한 기분. 마치 아내 같았다. 나는 수선화 꽃다발과 함께 편지를 썼다.


- 내가 가난하여 당신께 드릴 것이 꿈밖에 없습니다


그날 아내는 펑펑 울었고, 나는 그 모습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지금 아내의 변화가 더 억울하고 화가 났다. 아내는 왜 이렇게 변한 걸까. 어쩌면... 내 탓인지 모른다. 회사에 잘리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동안, 아내는 우리 둘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얼마나 헌신했을까. 바람에 흔들리는 바람개비처럼 우리의 관계를 흐르는 시간 속에 둔 나의 잘못이 크다.


밤이 깊어졌다. 늦은 새벽, 이상한 기척에 눈이 떠졌다. 아내는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곁눈질로 보니 아내의 휴대폰 스킨 속에는 어떤 남자가 서있었다. 아뿔싸. 기어코.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충동적으로 아내의 휴대폰을 빼앗듯 낚아챘다.


아내의 휴대폰에는 한 장의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사진 속에는 소년이 서있었다. 소년의 해맑은 얼굴, 소년이 입은 낡은 옷, 그리고 손에 들린 낯익은 수선화 한 다발. 사진 속 소년은... 바로 나였다.




수선화 꽃다발


낡은 셔츠 차림의 소년이 맨발로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의 손에는 뿌리 달린 수선화 한송이가 무겁게 들려있었다

아직까지 전하지 못한 이 꽃을 위해

이 꽃을 받으며 환히 꽃 피울 당신의 표정을 위해

무엇보다 수선화 대신 뜨겁게 떨릴 두 손을 위해

소년은 걷고 또 걸었다

까마귀 떼가 서쪽 하늘로 떠나고

짙은 향수병 같은 밤이 소년의 눈동자에 어둑하게 내렸을 때

오렌지빛 작은 세상들이 보이고

그 아래에서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숨바꼭질하는 소녀 앞에

유리조각이 만연한 바닥을 걷던 소년의 발도

구름으로 만든 이불을 뛰듯 가벼웠다


_ 황만복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