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쌀나무, 禾)의 공덕을 기리며 / 전원일기
가지런히 논을 꽉 채운 누우런 벼들이 가을을 풍요롭게 수놓습니다.
충북 음성군 봉학골 산림욕장 아래
용산리 저수지
2011년 10월 6일
요즘 출퇴근길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노랗게 들녘을 물들이는 벼들입니다.
노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여
어떤 꽃보다도 아름답고 평온한 풍요를 느끼게 하는군요.
허수아비는 보이지 않고 참새와 메뚜기는 아니 보여도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이 울컥할 정도로 행복해집니다.
봄부터 시작된 거룩한 농부님들의 수고
노란 황토흙 모판에 볍씨가 뿌려지고 아직 찬바람이 매섭던 들녘
논자락 한귀퉁이 못자리에서 그 고귀한 삶을 시작했지요.
4월 17일
밤에 단비가 내린 다음날 산책길에 첫 못자리를 보았지요.
'조팝나무 필 때면 못자리 내고, 아카시꽃 필 때면 모내기 한다'고
4월 27일
아침 산책중 물댄 논 그리고 저 멀리 암수 백로들
저 백로들이 내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 옛날 저 논이 저의 것이었으니...
그리고
어느 화창한 봄날 많은 이들의 축복속에 탁트인 논으로 나와서 햇살을 만끽했습니다.
비록 가냘픈 몸이지만 가을의 풍요를 꿈꾸며...
찰랑찰랑
논물과 여린 벼들의 바람에 흔들림은 요람처럼 부드럽고 간지러웠습니다.
5월 8일
모판이었던 곳
이논 저논으로 이사를 가서 본격적인 새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작은 비닐하우스에서 벗어나 온몸으로 비를 맞고 바람을 맞으며
따가운 햇살을 은혜로이 받아서 무럭무럭 자라겠지요.
6월 14일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
한여름 때약볓에서 태풍의 소용돌이를 견뎌내며
수고의 보답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7월 5일
들녁을 꽉채운 이 푸르름과 생명력
결실을 맺어가겠지요.
8월 15일
왕성했던 자람을 더디하고 결실을 맺어가는
처서(8.23.화)가 도래할 것입니다.
추수의 계절이 오는 것이지요.
둥그런 노란 추석을 지나며 알알이 송글송글
노랗게 씨앗을 맺혀가면서 겸손히 고개를 숙일 줄도 알았습니다.
찬란했던 짧은 일생
풍요로 답하며 샛노랗게 들녘을 물들였습니다.
그래서 벼는 노란색으로 말합니다.
지난 봄, 여름, 가을
말많은 세상에 말없이 욕심없이 지내왔다고...
이제
허수아비도 참새도 메뚜기도 찾지않지만
커다란 콤바인에게 노란 생명을 넘겨줍니다.
그리고 내분신은 커다란 자루에 일용할 양식으로 희생하고
내육신은 베어지고 쓰러져 하얀 비닐에 둘둘말려
또다른 생명의 먹이로 태어나려 커다란 마시멜로우가 됩니다.
9월 23일
산책나서는 길, 누런 들녁과 뿌연 안개
그리고 맺혀지는 이슬방울들
10월 22일
잘 익은 벼들이 고개를 숙이니 추수할 계절입니다.
11월 6일
추수가 끝난 논
커다란 마쉬멜로우 곤포(비닐) 사일리지
겨울 동물 사료용 볏짚에 효소처리 300여 kg, 10여만원
이제 너구리도 깃들지 않고 콤바인 소리도 들리지 않겠지요.
그리고 하얀눈이 내리면 그 가을날 찬란했던 노란 물결을 기억이나 할까요?
오늘은
긴 겨울의 한복판 휑한 들녁이지만 이겨내야 할 이유가 있고 기다려야 할 까닭이 있습니다.
봄날이 멀지 않았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