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역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미끄덩한 식감도 그렇고 비릿한 냄새도 싫어서 식구들 밥상엔 올려도 나는 조금 맛만 볼뿐이다. 미역국은 영양가가 많아 피를 맑게 하고 철분을 보충해 준다고는 하지만 나는 좋은 영양소가 식구들 몸에 잘 흡수되길 바라며 정성껏 푹푹 끓여낼 뿐이다. 그런 내가 미역국이 간절히 먹고 싶었던 때가 있었는데 바로 미국에서 아이 둘을 출산하고 나서였다.
내가 살던 곳은 오롯이 대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사계절 풍경이 정말 아름다운 작은 도시였다. 집 옆 10분 거리에 작은 비행장이 하나 있었고 슈퍼 두세 개, 그리고 작은 상가 수준의 몰이 두어 개 있었다. 호수를 따라 언덕배기를 올라가면 그곳의 유일한 종합병원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우연하게도 큰 아이와 작은 아이를 같은 병실에서 같은 간호사의 도움으로 낳았다. 워낙 작은 도시라 같은 날 아이를 낳은 사람도 한둘밖에 없었다.
큰아이는 10시간가량 진통을 하다가 새벽 4시에 낳았다. 당직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가 들어와서 거의 밤을 같이 새우시면서 옆에서 지켜보셨고 이젠 더 못 버티겠다 싶을 무렵이 되어 아이가 태어났다. 예정일보다 일주일 가량 늦은 출산에 그때 당시엔 엄청 가녀린 몸으로 제법 우량아를 낳은 나는 몸이 지칠 대로 지쳐서 팔 하나 움직일 힘도 없었다. 온몸에 기운이 빠져 누워있던 내 머릿속에 단 하나 먹고 싶은 음식은 아이러니하게도 미끄덩하고 비릿한 미역국이었다.
친정엄마는 친정과 시댁을 통틀어 첫 손주이자 첫 출산하는 내 산후조리를 도와주시러 먼 미국까지 오셨다. 딸이 아파하는 걸 볼 수 없다고 병원 길에 차마 따라나서지 못하고 집에서 밤새 맘을 졸이며 내게 먹일 미역국을 끓이고 또 끓이고 계셨다. 아이를 낳고 남편이 전화드렸다. 엄마의 미역국은 준비가 되었지만 새벽 4시, 택시도 없는 작은 도시에서 누구의 새벽잠을 깨워 병원까지 엄마를 모셔다 달라고 할 형편이 여의치 않았다. 미역국 생각이 간절했으나 병원에서 아침 첫 끼를 먹었다. 12월 한 겨울 아침으로 차가운 샌드위치, 소시지, 오렌지 주스, 요거트, 커피가 나왔다.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샌드위치 한입을 먹었다. 찬 오렌지 주스에 이가 시렸다. 엄마가 빨리 와서 미역국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아침이 밝아 9시가 다 되어 엄마의 미역국을 먹었다. 뜨끈뜨끈한 국물을 먹으니 허한 속이 채워졌다. 어쩌면 나는 그때 미역국보다는 미역국을 가져올 엄마를 더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첫 아이를 낳으러 갈 때 그 두려움과 긴 시간의 진통은 내가 상상하지 못한 고통이었고 나는 또 그런 엄마의 고통 속에 태어난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큰아이가 이제 막 걷기 시작하여 뒤뚱거릴 무렵 둘째가 태어났다. 둘째 때는 친정 엄마가 몸이 안 좋아서 오시지 못 했다. 혼자 산후조리할 생각으로 이래저래 준비하다가 큰아이를 낳고 제일 먼저 먹고 싶었던 음식이 미역국이었던 게 떠올랐다. 미리 충분히 끓여서 냉동실에 얼려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보내주신 산모용 미역을 물에 불려 소고기를 넣고 오래오래 볶아서 푹푹 끓였다. 큰아이는 내 다리에 매달려 칭얼거리는데 남산만 한 배를 하고 아이를 낳고 먹을 미역국을 끓이는 게 서러웠다. 겨우 참고 있던 울음이 그만 터져버렸다. 한국에는 산후조리원도 있고 산후도우미 아주머니도 있어서 몸조리에만 신경 쓰면 된다던데 내가 먹을 미역국을 끓여 얼려두는 것이 서러웠다. 남편이 많이 도와준다고는 해도 돌이 조금 지난 큰아이와 갓난쟁이를 돌보며 산후조리를 할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국을 조금씩 담아 얼리고 한 통은 전자레인지로 해동할 수 있게 밀폐용기에 넣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내가 진통이 시작되면 잊지 말고 얼려놓은 미역국을 챙겨 병원에 가 달라고 부탁했다. 며칠이 지나 둘째를 낳았다. 얼려놓은 미역국을 챙겨갔지만 첫 끼는 역시 샌드위치였다. 병원에 도착해서 1시간도 되지 않아 아이를 낳아버려서 꽁꽁 언 미역국이 자연해동될 새가 없었다. 성능 좋지 않은 전자레인지에 돌려도 돌려도 잘 해동되지 않아서 결국 병원 아침을 먼저 먹게 되었다. 미역국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렇게 또 마른입에 샌드위치를 먹었다.
얼마 전 엄마가 자연산 미역, 생김, 멸치, 된장 등을 보내주셨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가끔이긴 하지만 진한 국물의 소고기 미역국은 먹을 만하고 비린 맛은 예전보다는 덜 한 것 같다. 미역은 미역대로 김은 김대로 신문에 몇 겹씩 싸서 비닐봉지에 담아 강정과 함께 보내 주셨다. 오랜만에 한국 신문을 보니 반가웠다. 그리고 미역을 싸며 이리저리 닿았을 엄마와 아빠의 손길이 느껴져서 좋았다. 아빠가 마루에 앉아 보셨을 신문, 베란다 한쪽 켠에 뒀다가 미역과 김과 함께 딸려 온 신문엔 친정집 냄새도 가득 배어 있었다.
다음 날 저녁 엄마가 보내준 미역으로 넉넉히 미역국을 끓이려고 무쇠솥을 꺼냈다. 바로 둘째 아이 출산 전 미역국을 끓였던 솥이다. 2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도 바라지 않고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참기름을 넣고 소고기와 미역을 달달 볶았다. 다싯물을 넣고 끓였다. 보글보글 끓는 국을 보고 있으니 문득 출산을 앞두고 눈물로 끓였던 미역국이 생각났다. 미역이 부드러워지고 진한 국물이 우러나는 동안 나는 괜스레 마음이 울컥했다. 한 시간여 오래 끓인 미역국은 진한 맛이 났다. 생김 몇 장을 가스불에 슬쩍 굽고 양념장도 만들었다. 미역 비린내, 김 비린내가 집안에 가득했지만 이젠 비리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바짝 마른입에 배어 물었던 샌드위치도, 이가 시리도록 찼던 오렌지 주스도, 눈물로 끓였던 미역국도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