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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여울 Dec 19. 2021

20달러가 뭐라고

체리 한 통을 손에 들고 망설였다


남편과 아이들이 한국에 간 지 어느덧 보름이 되었다. 남아 있는 식재료를 모두 다 비운 후에 장을 볼 생각으로 리스트를 쭉 적어메뉴를 짜고 본격적으로 냉장고 파먹기를 시작했다.  먼저 냉동실에 넣어두고 아이들에게 미처 해 먹이지 못 한 재료들을 꺼냈다. LA갈비를 재워서 1인용으로 소분해서 얼려두고 돼지고기 목살을 꺼내 고추장 양념으로 제육볶음을 했다. 동태살을 꺼내 전을 부치고 고등어로 칼칼하게 조림을 했다. 어묵을 꺼내 무를 넣고 시원하게 어묵탕을 끓였다. 얼려둔 사골 국물로 만둣국을 해서 먹었다. 찬장에 들어있는 참치를 꺼내 삼각김밥을 만들었다. 먹다 남은 키위, 사과, 파인애플은 모두 갈아서 올리브유를 넣고 샐러드용 소스로 만들어 냉동실에 얼렸다. 모두 다 비우기 전에는 몇 가지 야채나 빵만 사고 장을 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기 때문에 조금 번거롭긴 해도 나를 위한 집밥을 해 먹고 있다.      


샐러드용 야채와 빵을 사러 집 앞 슈퍼에 갔다. 곧장 야채 코너로 가서 샐러드용 야채를 담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과일 코너에 알이 탱탱하고 싱싱한 호주산 체리가 진열되어 있었다. 보통 체리를 사려고 보면 꼭지도 약간 시들하고 물러 보였는데 오랜만에 연초록빛싱싱한 꼭지가 달린 체리를 보니 눈길이 멈췄다. 체리 500그램에 20달러(17,000원) 그것도 정가가 26달러(22,000원)인데 세일한 가격이었다. 체리 한 통을 집어 들고 바구니에 담을지 말지 고민을 하며 서성였다.  


‘맛있어 보이는데 너무 비싸다. 세일해서 20달러가 뭐야. 한두 번 먹으면 다 먹을 것 같은데.’

‘우리 딸 ㅇㅇ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체리인데. 왜 하필 ㅇㅇ가 없을 때 이렇게 싱싱한 게 수입됐지.’

‘맛있게 생겼는데 그냥 나 혼자 먹을 거라도 한 통 살까.’

‘아니, 혼자 먹자고 저 비싼 체리를 사는 게 좀 그렇잖아. ㅇㅇ가 있으면 몰라도.’

‘그래, 그렇지? 혼자 먹자고 저걸 사는 건 좀 그렇다. 끼니로 먹을 것도 아니고.’     


진열대 안에 있는 체리 한 통을 꺼내 손에 들고 서성이는 동안 아이들을 데리고 온 젊은 부부가 요리조리 살펴보고선 한 통을 꺼냈다. 할머니 한 분이 오셨다. 한 통을 꺼내 이리저리 살피시더니 바구니에 담으셨다. 또 다른 부부가 와서 보더니  통을 꺼내 카트에 담았다.


나는 결국 꺼낸 체리 한 통을 다시 넣어두고 돌아섰다. 아침으로 먹을 사워도우 빵과 크림치즈를 담고 천천히 물건들을 구경하며 계산대로 걸어가는데 아까 본 체리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에이, 그냥 하나 사자. ㅇㅇ가 없으면 어때. 진짜 싱싱해 보이데 고민 말고 사자.’ 진열대로 다시 가서 이리저리 눈으로 살펴보고 한 알이라도 더 들어있을 것 같은 체리 한 통을 꺼내 바구니에 담았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체리 한 통을 선뜻 담지 못하고 서성였던 내게 마음이 쓰였다. 20달러가 뭐라고.   

  



싱가포르의 비싼 물가와 집 렌트비, 상상을 초월하는 차량 등록세와 자동차 가격, 비시민권자로 내는 학비, 비싼 병원비 등을 감당하며 매달 조금씩이라도 모으려면 알뜰살뜰하게 사는 방법밖에 없었다. 꼭 필요하지 않으면 사지 않았고 장을 볼 때도 가격을 비교해 가며 꼼꼼히 골랐다. 다행히 해를 거듭할수록 집도 사게 되고 차도 사게 되고 안정이 되어 이제는 조금 여유롭고 편안해졌다. 뭐든 마음만 먹으면 크게 못 할 것도 없는데도 체리 20달러에 손이 오그라들었다. 나 홀로 먹을 체리 값으로 20달러가 너무 비싸게 느껴졌다. 그것도 한 줌 밖에 안 되는데.     


집에 와서 체리 한 통을 얼른 씻어 맛을 봤다. 싱싱해 보여도 시기만 하고 맛이 없는 게 있는데 제철을 맞은 호주산 체리가 적당히 새콤하면서 달고 싱싱했다. 과육을 씹는 맛이 살캉살캉하니 식감이 좋았다. 씻으면서 몇 개를 먹고 물기를 제거해서 통에 담아 냉장고에 뒀다. 저녁으로 된장찌개를 끓이고 밥에 샐러드용 야채를 넉넉히 넣고 달걀 프라이와 고추장을 넣고 비볐다. 체리도 접시에 담았다. 저녁을 먹은 후 체리를 먹고 있는데 아이들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엄마, 지금 뭐 해요?”

“응, 엄마 지금 저녁 먹고 체리 먹어.”

“엄마, 나도 체리 먹고 싶어요. 체리 맛있어요?”

“응, 맛있어. ㅇㅇ는 한국에서 맛있는 음식하고 과일 먹고 있잖아. 귤 많이 먹고 와.”

“네, 알겠어요. 그런데 나도 체리 먹고 싶어요.”

“한국에도 체리 많이 있을 테니까 슈퍼에 한번 가 봐.”     


전화를 끊고 나니 체리를 집는 내 손이 짠해졌다. 한국에서 맛있는 음식도 과일도 잘 먹고 있을 텐데도 딸의 말에 마음이 쓰였다. 체리를 넘기는 목구멍이 조금 무거워졌다. 딸이 돌아왔을 때도 싱싱한 게 남아있으면 좋을 텐데... 어느새 씻어놓은 체리의 반을 먹었다. 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달러의 값어치를 할 만큼 충분히 새콤 달콤 살캉한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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