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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여울 Dec 10. 2021

있는 그대로의 내가 좋다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만 남길


“ㅇㅇ 씨, 크리스마스도 됐는데 뭐 사고 싶은 거 없어?”

“아니, 난 없어.”

“목걸이든 뭐든 하나 사지?”

“아니야, 난 괜찮아. 아무것도 필요한 게 없어.”

“아니, 정말 아무것도 필요한 게 없어?”     


얼마 전 남편과 나눈 대화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크든 작든 원하는 선물을 하나씩 샀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즐거움 중에 하나였고, 열심히 일하고 아이들을 키운 대가라고 생각했다. 주로 목걸이나 귀걸이 같은 액세서리류를 샀다. 하지만 올해는 아무것도 사지 않을 생각이다.


작년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나도 모르게 살아가는 방식과 생각이 서서히 바뀌었다. 우선 매달 가던 페디큐어 숍에 가지 않게 되었다. 언제 어떻게 전염될지 모르니 다른 사람과 같은 세면대에 발을 넣고 각질을 제거하고 페디큐어를 받기가 무서웠다. 발톱이 지저분해지는 걸 참아가며 견뎠다. 발톱에 페디큐어가 지워지니 그간 색을 예쁘게 펴 바르기 위해 사포로 문질러 놓은 흔적이 그대로 드러났다. 발톱이 엉망진창이었다. 오랜 세월 이렇게 발톱을 힘들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참으로 미안했다. 당분간은 발톱이 숨을 쉬고 회복할 수 있게 그냥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매달 가던 미용실도 뜸하게 가게 되었다. 작년 5월에는 정부 방역 지침으로 인해 한 달 동안 미용실 영업도 금지되었다. 단발머리가 지저분하게 길었다. 머리띠를 하거나 머리핀을 꽂았다. 미용실에 가지 않으니 자연히 염색도 못 하게 되었다. 삐죽삐죽 보이는 흰머리가 눈에 거슬렸다. 뽑고 뽑다가 그만뒀다. 어차피 누구를 만나지도 못하니 흰머리가 있어도 상관없었다.      


옷도 사지 않았다. 그저 슈퍼마켓에 갈 편한 반바지와 면 티셔츠만 있으면 충분했다. 작년 상반기에는 방역 지침에 따라 한 집에 같이 살지 않는 가족조차 만날 수 없었기 때문에 지인들과의 사적인 모임은 당연히 없었다. 옷장에 옷이 가득했지만 입을 일이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페디큐어를 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내 맨발톱이 혈색 있는 분홍빛을 띠어 건강해 보였다. 흰머리 역시 크게 고민되지 않았다. 청반바지에 티셔츠가 점점 편안해졌고 작은 액세서리만으로도 잘 어울렸다. 옷이 편안해지니 굳이 화장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민낯에 로션과 선크림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고 립스틱만 살짝 발랐다.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간 나 스스로에게 보기 좋게 꾸민 것도 있었지만 남들에게 예쁘게 보이려 했던 마음이 더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의 내 삶은 나에게 충실하고 내면이 깊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 챙김 명상을 하고 고요한 내면으로 들어가서 내 안의 나를 만났다. 나를 어루만져 주고 위로해 주고 힘과 용기를 주고 다른 사람의 축복을 빌어주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컬러링북을 사서 색연필로 색을 채웠다. 전자책 정기 구독을 하면서 책을 더 많이 읽게 되었다. 오디오북을 들으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저자가 읽어 주는 오디오북은 책을 읽는 것과 또 다른 신선함이 있었다. 시집을 더 많이 읽고 시적 자아가 되어 시 속으로 빠졌다. 소설 속의 작가가 그려놓은 상상의 세계를 그려보며 그 시간을 즐겼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정한 즐거움이 가득해졌다.

    

며칠 전 우연히 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았다. '소통'으로 유명한 강사 김창옥 님이 나다. 타인의 힐링과 타인의 소통을 위해 강의해 지만 정작 본인과 제대로  소통을 했다 했다. 그래서 제주도에 내려와 쉬면서 본인과 소통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다.      


“우리의 정서가 허기지면 착각을 한대요. 물건이 없다고 생각을 한대요. 신을 신발이 없다. 입을 옷이 없다라고요. 물질적인 것을 채워도 정서의 허기는 안 없어져요.”     


그렇다. 나는 김창옥 님의 말에서 답을 얻었다. 내가 지금 필요한 게 없고 사지 않음에도 부족함이 없다고 느끼는 것은 내 정서가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매해 사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지 않아도 매일 선물이 가득한 것 같고 꾸미고 치장하는데 많은 시간을 내어줬던 내가 꾸밈없는 모습으로 살아도 괜찮아 보이는 건 내 안의 나와 잘 소통하고 긍정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빨리 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집중했다는 것이에요. 뇌는 재미있다고 느끼고 재미를 느끼는 뇌는 만족하고 스트레스를 지워버려요."


나는 글을 쓸 때 그렇다. 10분쯤 지났나 하고 보면 1시간이 훌쩍 지났다. 글을 쓰는 서너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내가 글을 쓰든 다른 작가님들의 글을 읽든 글 속에서 행복하고 글 속에서 기쁘다. 좋아하는 라디오 음악 방송을 들으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내가 보낸 사연과 노래가 나오면 혼자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한다. 밤에 시인이 진행하는 음악 방송에서 시와 함께 노래를 듣다 잠이 든다. 편안하다.

  

한차례 비가 세차게 내리더니 하늘에 무지개가 너무나도 예쁘게 떴다. 그것도 쌍무지개로. 거실 베란다에 발을 내리고 한참을 올려다봤다. 앞으로의 내 삶이 어떻든 내 마음만큼은 무지갯빛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환경에도 비 온 뒤에 떠오를 저 무지개를 생각하며 내 마음의 곳간을 풍요롭게 채워가고 싶다.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만 가득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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