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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여울 Dec 04. 2021

아빠의 목소리 톤은 '도, 레, 미'

편지로 전해주시던 사랑


1970년대, 국민학생이었던 나는 방학이면 늘 아빠가 계신 소도시로 갔다. 오빠와 나 그리고 동생의 학교를 위해 부모님은 그 시절엔 드문 주말 부부를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방학이 되면 엄마는 이런저런 소소한 살림살이를 챙기고 우리는 방학 숙제를 챙겨 아빠 집으로 가서 한 달 동안 지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일 년에 두 번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에 그렇게 아빠 집에서 방학살이를 했다.


아빠 집에서 사는 한 달은 참 신나는 일이었다. 아빠와 같이 바다 구경도 하고 해산물도 먹었다. 근처 풀장에도 가서 며칠 머물기도 했다. 뭔가 내가 살던 곳과 다른 냄새와 분위기와 맛이 있었다. 그건 뭐랄까. 요즘 유행하는 ‘제주도 한 달 살기’와 같은 그런 맛이었다. 방학이 끝나면 아빠는 토요일에 집에 오셔서 같이 주말을 보내고 일요일 오후엔 다시 그곳으로 가셨다. 내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그렇게 오랜 세월을 그곳과 집을 오가며 일하셨다.      


아빠와 같이 일상을 보낸 시간은 많지 않다. 내가 또 대학교를 서울로 오게 되면서 집을 떠나왔기 때문이다. 처음 집을 떠나 낯선 대학교 기숙사 생활을 했을 때 집이 많이 그리웠다. 동전을 잔뜩 바꿔 공중전화로 전화를 해도 동전을 넣기가 무섭게 금세 동이 났고 눈물이 가득 맺힌 채 방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런 내게 아빠는 자주 편지를 보내주셨다. 대부분의 내용은 공부도 좋지만 건강이 제일 중요하고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거니 항상 몸 건강에 유의하라는 말씀이었다. 편지지 속에 ‘센스 있게’ 우체국 소액환 증서를 같이 넣어 엄마한테 말하지 말고 쓰라고 하시면서. 아빠의 편지는 이후로도 쭉 서울에서 미국으로 왔고 낯선 곳에 있던 내게 늘 힘이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아주 따뜻하게 남아있는 추억이다.




아빠와 질적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건 몇 해 전 크리스마스 무렵 아빠가 예기치 않는 수술을 하시고 병원에 계실 때였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일본과 홍콩에 다녀왔다. 여행하는 동안 이상하게도 친정 생각이 많이 났다. 일본에서도 홍콩에서도 불과 3개월 전에 다녀온 친정이 왜 그렇게 생각이 나던지 참 이상하다 생각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짐을 풀고 있는데 새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가 응급 수술을 하고 계시다고. 잘못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예상치 못한 전화에 너무 당황하고 놀라서 마음이 진정되지가 않았다. 겨울옷도 없이 얇은 가을 패팅 하나 걸치고 그날 밤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친정으로 갔다. 아빠는 장 천공으로 응급 수술을 하셨고 중환자실에 계셨다.      


급히 떠나왔지만 며칠 한국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병원에서 엄마와 번갈아가며 밤낮으로 아빠 곁에 있었다. 임시로 차고 계시던 장루 주머니를 갈아 드리고 뱉은 가래를 치우고 소변통을 비우고 기저귀를 갈아드리고 따뜻한 물에 가재 수건을 적셔 얼굴을 닦아 드렸다. 아빠가 밥을 드시면 나도 한쪽에 앉아 가져온 도시락을 먹었다. 잠시 주무시면 편의점에 내려가서 커피 한 잔을 사서 올라왔다. 다행히 회복을 잘하시는 듯하여 열흘 가량 한국에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늘 멀리 있느라 잠시 잠깐 친정에 다녀오던 내가 처음으로 딸로서 도리를 한 것 같았다. 인천 공항에서 싱가포르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아빠에게서 카톡이 왔다. “아침 먹고 머리 감고 머리 빗고 나니 좀 좋아 보인다.”하시면서 침상에서 누워 찍은 셀카 사진과 함께 보내셨다. “ㅇㅇ, 조심해서 잘 가거라. 많이 힘들었지?... 열심히 살거라! 이번에 고생 많았다.” 그렇게라도 잠시 곁에 있다 떠나는 내가 눈에 밟히셨나 보다.     




아빠의 목소리 톤을 음계로 나타내면 ‘도, 레, 미’ 톤이다. 조용하고 차분하고 부드럽다. 그리고 아주 느리다. 말씀이 별로 없는 분이라서 이야기를 길게 이어나가지는 못 한다. 전화 통화는 3분이면 충분하다. “별일 없나? 모두 잘 지내나? 건강하나? 잘 지내라.” 요즘 들어 내가 이래저래 대화를 이끌어 나가면 곧잘 말씀도 하지만 대부분은 짧은 몇 마디의 대화로 마친다. 옆에서 엄마하고 통화하는 걸 들어서 다 알고 계시다면서. 거친 세월을 살아오며 풍파를 많이 겪으셨다지만 고운 심성은 그대로 남아 인품으로 빛이 나고 짧은 대화 속에서도 나는 아빠의 묵직한 사랑을 느낄 수가 있다.


지난 2년간 한국에 가지 못 했으니 내년 초에 한국에 가면 아빠도 나도 조금은 더 세월의 나이를 먹었을 테다. 그래도 50대인 내가 "아빠"하고 부를 사람이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나도 아빠 딸이라 그런지 말로 표현을 잘 못한다. “사랑해요”라는 말이 도무지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언젠가 내 글을 읽으실 날을 생각하며 글로 내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다.


“아빠, 사랑해요. 그리고 아주 많이 고마워요.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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