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여울 Dec 16. 2022

박준 시인의 목소리가 그립다

매일 밤 11시에 만나던 그의 목소리


고요한 밤에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는 것은 10대 때부터 50대가 된 지금까지 변함없이 내가 즐기는 일이다. 라디오 다이얼을 돌려가며 주파수를 맞춰 듣던 그때부터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듣는 지금까지 라디오는 나에게 감성 가득 싣고 찾아오는 반가운 친구이다. 지난 학창 시절을 떠올릴 때면 MBC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를 빼놓을 수가 없다. 엽서를 예쁘게 꾸며 사연과 신청곡을 적어 보내면 가끔 내 사연이 뽑혀서 방송을 타기도 했다. 워낙 인기가 많았던 프로그램이라 방송이 된 다음 날 학교에 가면 전날 방송을 들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다. 오랜 해외살이를 하고 있는 지금 나에게 있어서 라디오 방송 청취는 단순히 음악 듣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풍경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고 한국의 냄새를 맡는다는 의미도 있다.

      

나는 CBS 음악 FM을 즐겨 듣는다. 매일 오전 8시(한국 시간 오전 9시)에 방송되는 피아니스트 김정원의 ‘아름다운 당신에게’는 클래식과 함께 기분 좋은 아침을 열어 주고 밤 9시(한국 시간 밤 10시)에 방송되는 허윤희의 ‘꿈과 음악 사이’는 잔잔한 밤을 선물해 준다. 그 무엇보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프로그램은 밤 11시(한국 시간 자정)에 방송되던 박준 시인의 ‘시작하는 밤’이었다. 박준 시인이 직접 지었다는 프로그램 제목 ‘시작하는 밤’은 자정이 하루의 끝이 아니라 하루를 시작하는 밤을 의미하며 시를 짓는 밤이라는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고 했다. 깊은 밤에 흘러나오는 박준 시인의 따뜻한 목소리는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나는 그의 목소리에 기대어 하루를 마무리하고 또 다른 하루를 시작했다.


‘시작하는 밤’은 박준 시인이 직접 작성한 멘트와 선곡들 그리고 청취자들의 신청곡으로 방송이 진행되었다. 가요와 팝송을 오가는 선곡은 밤 분위기에 잘 스며들었다. 무엇보다 박준 시인의 감성을 청취자들에게 잘 전달해 주는 특별한 두 코너가 있었다. ‘시/인/송'이라는 코너는 노래 속 아름다운 가사를 들려주는 코너였다. 평소 멜로디에 가려져 잘 들리지 않았던 노랫말을 짚어보는 코너였는데 박준 시인이 읊어주는 노랫말을 들으면 옛 노래뿐만 아니라 요즘 아이돌들이 부르는 노래도 시만큼 아름다운 노랫말로 쓰여짐을 알 수 있었다. '시 처방'코너는 청취자들의 고민을 담은 사연을 읽어 주고 그 사연에 따른 시를 처방해 주는 코너였는데 시인이 처방해 주는 시와 해설을 들으면 시가 주는 위로가 얼마나 큰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가끔 방송을 듣다 보면 노래 신청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밤하늘의 별이 유난히 반짝이는 밤에는 유미의 '별'을 신청했고 달빛에 마음이 쓸쓸해진 날에는 Louise Tucker의 'Midnight Blue'를 신청했다. 옛 추억에 잠긴 날에는 나에게는 영원한 오빠 이치현이 부른 ‘다 가기 전에’를 신청했고 스위트 한 밤 분위기에 스며들고픈 날에는 Justin Bieber의 ‘Off My Face’를 신청했다. 싱가포르에서 안젤라 님이 보내주신 신청곡이라는 그의 멘트가 나오면 발을 동동거리며 좋아했고 스포티파이 앱으로 들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새로운 맛이 있었다. 나는 매일 ‘시밤(시작하는 밤)’을 기다렸고 ‘시밤’에 흠뻑 빠져 하루를 마무리했다.     


지난 9월 26일 박준 시인이 진행하는 ‘어제의 마음을 모아 시작하는 밤’의 마지막 방송일이었다. 프로그램 개편으로 DJ가 바뀐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날 나는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아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시밤’이 없는 밤을 상상할 수 없었다. 일찍 잠자리에 드는 날에는 ‘시밤’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재생 중지 세팅을 해 두고 꿈속에서라도 박준 시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을 잤는데 내게 늘 위로가 되어주던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나도 아쉬웠다. 나는 박준 시인의 목소리가 그리울 땐 언제든지 꺼내 들을 수 있도록 마지막 방송까지 녹음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방송에는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듣기 어려운 노래 두 곡 정호승의 ‘수선화에게’와 오장환의 ‘고향 앞에서’를 들을 수 있었다. 시인이 진행자였기에 들을 수 있는 노래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더욱 아쉬웠다.


게시판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애청자들이 들어와서 채팅에 참여하고 있었다. 익숙한 닉네임도 있었지만 마지막 방송이어서 인사차 들어온 애청자들도 많았다. 가끔 신청곡과 함께 사연을 보내기는 했지만 실시간 채팅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나도 그날만큼은 박준 시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남기고자 채팅방에 흔적을 남겼다. ‘준디'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박준 시인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메시지를 남겼다. 시계는 어느덧 자정을 넘어 새벽 1시를 향해 가고 졸음이 쏟아졌지만 생방송으로 들을 수 있는 그의 목소리를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아 두 눈을 부릅뜨고 졸음을 참았다. 나는 그날 방송에 나온 모든 곡들에 하트를 눌러서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는 마음을 전했다. ‘준디’가 떠난 후 며칠 동안 새 진행자에 적응해 보려고 했지만 마음이 가지 않았다. 애써 맞추려고도 노력하지 않았다. 깊은 밤이 찾아와 무심코 ‘준디’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는 아이패드에 녹음해 둔 방송을 꺼내 듣는다. 차분하고 따뜻하고 시를 닮은 그의 목소리가 나는 참 좋다. 나의 수많은 밤을 따뜻하게 밝혀준 박준 시인의 ‘시작하는 밤’이 오늘 밤 무척이나 그립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 생각이 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