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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여울 May 19. 2023

난생처음 화실에 갔다

화가와의 대화

  

10여 년 전부터 마음에 담아 둔 게 있었다. 화실에 다니면서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핑계 같지만 아이들을 키우며 일하다 보니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었다. 이제야 꿈만 같은 시간이 생겼다.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비가 세차게 내려 길이 막혔다. 집에서 조금 여유 있게 나왔는데도 수업 시작 5분 전이었다. 차에서 내려 우산을 쓰고 잰걸음으로 걸었다. 화실은 도심 속 작은 공원 안에 있었다. 쭉쭉 뻗은 열대 나무와 화려한 열대 꽃이 나를 반겼다. 드디어 화실에 도착했다. 화실은 사방이 통유리로 둘러져 있어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주 아름다웠다. 초록빛 싱그러운 나무보이 길게 쭉 뻗은 파란색 리플렉팅 풀보였다.       


프런트 데스크에 가서 내 이름을 말했다. 직원은 내가 부킹 한 선생님을 확인한 후 나에게 스튜디오 1로 가라고 했다. 스튜디오 안에는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자 네 분, 30대로 보이는 남자 한 분이 있었다. 모두들 이젤 위에 전지 크기 만 한 캔버스를 올려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도 빈자리에 앉았다. 옆 사람과의 공간이 넓어 답답하지 않았다. 오늘 수업하실 선생님이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오셨다. 제일 먼저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재생하셨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자 스튜디오 안의 분위기가 이내 부드러워졌다. 캔버스 위에 쓱쓱 물감을 칠하는 소리, 터펜타인이 담긴 플라스틱 통에 딸깍거리며 유화 붓을 씻는 소리가 부드러운 멜로디 위에 얹어졌다. 등받이가 없는 까만 의자에는 알록달록하게 물감 얼룩져 있고 벽에는 다 마르지 않은 유화 몇 점이 걸려있었다.      


창밖으로 싱그러운 나무가 보인다


선생님이 내 자리에 와서 옆에 앉으셨다. 나에게 그림을 배우는 목적과 기간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이루고 싶은 목표가 무엇인지 말해보라고 하셨다. 나는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 미술과 쭉 친구로 지내고 싶다고 했다. 수채물감, 유화물감, 아크릴물감 등 다양한 물감을 골고루 사용해 보고 싶다고 했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며 나와 같이 할 미술 수업은 끊임없이 대화하는 시간이 될 거라고 하셨다.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뭘까요? 마음, 눈, 손, 이 세 가지 중에 두 가지를 말해 보세요.”

... 마음하고 눈일 것 같은데요.”

“왜요?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면 손은 저절로 따라갈 것 같아요.”

“맞아요. 몸이 불편해서 발가락에 붓을 끼워 그리는 사람도 있고, 입에 붓을 물고 그리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게 아니에요. 눈으로 본 걸 마음으로 그리는 거예요. 손은 그저 도구일 뿐이에요.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느낌을 받아요. 나는 사람들이 자의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본 걸 잘 표현할  수 있도록 와줘요. 싱가포르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중국 사람들 대체로 각하며 그림을 그려요. 연필로 각도를 재고 명암을 넣고 정확하게 그리려고 해요. 왜 그렇게 정확하게 그리려고 할까요?”

“틀리지 않으려는 습관이 있어서 그런 아닐까요?”

“네. 맞아요. 평상시 우리는 논리와 언어를 담당하는 좌뇌를 많이 써요. 그림은 좌뇌의 도움을 받아 우뇌로 그리는 거예요. 싱가포르만 해도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일방향 수업을 아직도 많이 하고 있어요. 이러한 수업 방식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그림을 그릴 때도 좌뇌의 간섭을 많이 받아요. 창의성을 발휘하는 우뇌가 제 기능을 못하는 거죠. 그래서 나는 사실대로 그리고 싶으면 그냥 사진을 찍으라고 말해요.”

“많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제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라는 거죠?”

네. 맞아요. 앞으로 4주 동안은 몇 가지 색만 사용해서 다양한 색을 만들어 보는 연습을 할 거예요. 자, 그럼 이 박스 안에서 마음에 드는 풍경 사진을 고르세요. 그리고 유화와 아크릴물감 중 하나를 선택하세요.”     


내가 고른 풍경화,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의 작품 At Calcot


선생님은 수백 장의 풍경 사진이 들어 있는 통을 내게 건네주셨다. 그중에서 나는 파란색이 많은 쿨톤의 풍경 사진을 골랐다. 4주 동안 완성하기 어려워 보였지만 눈길이 가는 대로 집었다. 그리고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아크릴 물감을 선택했다. 이젤 위에 하얀 캔버스를 올려놓았다. 팔레트에 갈색, 흰색, 노란색 물감을 짰다. 너무 얇지 않은 붓으로 대충 밑그림을 그렸다. 밝은 부분부터 어두운 부분까지 명암을 구분해 주었다. 갈색에 흰색을 섞기도 하고 갈색에 노란색을 섞기도 하며 밝고 어두움을 표현했다.      


밑그림을 대충 그리고 명암을 칠해 주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선생님이 내게 자주 하신 말씀은 너무 조심해서 그리지 말라는 거였다. 실수하지 않으면 배울 수 없고 잘못된 부분은 나중에 수정하면 된다고 하셨다. 붓을 너무 가까이 잡으면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붓을 멀리 잡고 넓게 보라고 하셨다. 나는 선생님의 격려에 용기를 내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을 조금 더 대담하게 그리기 시작했다. 명암을 칠할 때는 큰 붓을 사용해서 캔버스에 쓱쓱 거친 소리를 내며 페인팅을 했다. 선생님은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다. 다음 주에 색을 더 입히고 하시고 수업을 마무리하셨다.      


덜 마른 캔버스는 창고에 두고 화구박스만 챙겨서 나왔다. 수업이 끝나고도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그새 소낙비는 그쳤다. 발걸음은 도심 속 작은 공원길로 향했다. 길을 걸으면서 선생님과의 대화를 되짚어 보았다.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핸드폰 녹음해 두었다. 오늘 내가 화실에서 보낸 두 시간은 아주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열심히 일한 대가로 얻은 소중한 시간이었고 가치 있게 흘려보낸 그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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