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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을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서산 - 서산한우목장, 개심사, 가야산

by 유환희


서산한우목장은 넓었다.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느낀 건, 들판이 아니라 하늘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풀밭보다도 더 넓은 하늘의 바닥, 그 위에 낮게 걸린 구름들이 마치 초지의 연장처럼 보였다. 바람은 거칠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저 귓가를 스쳐 지나가며, 계절의 중간쯤을 보여주었다. 풀은 이미 여름의 빛을 벗었지만,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았다. 누런색과 연두색이 뒤섞인 그 표면은, 마치 시간의 경계가 뭉그러져버린 듯한 색이었다. 멀리 소들이 흩어져 있었다. 느릿한 발걸음, 고개를 숙인 채 풀을 뜯는 모습이 들판의 리듬을 완성하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면 풀들이 순서 없이 눕고, 그 위로 구름의 그림자가 흘렀다. 사람보다 자연이 먼저 움직이는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하루의 빠르기가 느려졌다.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도, 지나간 것을 붙잡을 필요도 없었다.




목장 위를 걷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언덕 너머로 작아질 때, 그 풍경 전체가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바랜 색으로 남았다. 살아 있는 장면인데도 이미 과거처럼 보였다. 그것이 서산한우목장의 독특한 정적이었다.




소들이 있는 능선 쪽을 바라보면, 풀빛의 얼룩 사이로 가을이 조금씩 번지고 있었다. 산등성이엔 초록의 잔재가 남아 있었지만, 그 사이사이로 갈색이 스며들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길이 아니라, 오랜 바람의 반복으로 만들어진 변화였다. 계절은 늘 그런 식으로 온다. 소리 없이, 그러나 완벽하게. 목초의 냄새와 흙의 온기가 섞인 공기 속에서 나는 문득, ‘이곳은 사람보다 시간이 더 오래 숨 쉬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서산한우목장의 언덕에서 바라본 풍경. 이곳으로 가는 길 내내 추수를 기다리는 노란빛들이 가득했다.




느지막하게 걸으며 천천히 개심사로 향한다.




개심사 앞의 작은 우물가에 서 있었다. 물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표면 위에는 몇 장의 낙엽이 떠 있었다. 노랗게 바랜 잎, 가장자리가 조금씩 말려 들어간 잎, 그리고 아직 초록빛이 남은 잎들이 한데 모여 조용히 빙글거렸다. 바람이 스치면 잎들은 잠시 돌다가,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느린 회전이 마치 시간의 움직임 같았다. 가을이란 결국 이런 속도로 오는 것일까. 요란하지 않게,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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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 주변으로 보이는 가야산의 숲은 여전히 초록이 반 이상이었다. 먼 능선에 단풍이 번지려다 만 듯, 곳곳에 붉음이 묻혀 있었다. 가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미완의 풍경이 오히려 더 진심처럼 느껴졌다. 초록과 노랑이 섞인 그 모호한 계절의 색, 그 안에서 나는 ‘변화’란 완결된 상태가 아니라 머무는 과정임을 깨달았다. 우물 위 낙엽은 천천히 물 아래로 가라앉으며, 그렇게 가을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서산한우목장과 개심사, 그리고 가야산은 어떤 거창한 풍경보다 조용히, 그러나 깊게 계절을 품고 있었다. 그곳의 가을은 완성되지 않은 채 머물러 있었고, 그래서 더 살아 있었다. 완벽한 단풍보다, 아직 남은 푸름이 더 진실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미묘한 시간의 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마 ‘가을’이란 건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천천히 지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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