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가장 뜨겁던 여름
꼬박 8년의 난소암으로 투병하셨던 나의 엄마는 길고 긴 암투병 끝에 2013년 숨을 거두셨다. 목욕탕 가는 걸 좋아하고, 우리 아빠가 첫사랑이었던, 가족밖에 몰랐던 백색처럼 순수했던, 표현이 서툴러서 따뜻한 손길이나 말 한마디 잘못했던, 자주 엄하게 혼을 내시고 매를 드셨던, 매를 들었던 밤이면 잠든 나를 찾아와 때렸던 부위를 살피며 미안하다는 듯 투박하게 쓰다듬던,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자식 넷을 키우며 발 동동 구르며 헤맸을 그런 나의 엄마.
23년 간 엄마와 함께했던 추억도 추억이지만, 나에게 인상적으로 남았던 기억 중 초두와 초미를 담당했던 기억이 있다. 엄마의 암 선고받던 날과 담당 의사가 마음에 준비를 하라고 말하던 날. 16살과 23살의 기억이다.
엄마는 도내에서 그나마 크다는 대학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고, 당시 암이 의심된다는 말을 듣고 당시 의사가 서울아산병원에서 검사를 받을 것을 권했다. 그날은 7월이나 8월쯤.
푹푹 찌던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계절이었고, 우리는 그 계절 오이 고추를 심었었다. 엄마에게 닥칠 상황에 대한 ‘만에 하나’를 이모에게 미리 들었던 우리 사 남매는 그만 ‘암’이라는 단어 만으로 얼어붙었었다. 당시 늦둥이 남동생은 8살이었다. 결국 엄마는 도내 대학병원에서 이미 진행이 꽤된 암으로 보인다며 더 큰 서울아산병원으로 가보라며 소견서를 써주셨다. 종일 언니와 나, 남동생은 조마조마하며 엄마를 기다렸다. 늦은 오후가 돼서야 엄마가 집에 도착했고, 우리는 무거운 마음을 애써 숨기며 엄마를 맞았다. 굳은 엄마 얼굴을 보고 나와 언니는 직감적으로 이모가 말했던 그 불길한 '만에 하나'가 맞는구나 싶어 그만 눈물이 고였고, 남동생은 뭣도 모르고 주춤주춤 눈치만 살폈었다.
당시 내 맘을 더 미어지게 만든 건 암선고를 받고 굳이 근처 지하상가에 들려 어린 남동생의 운동화를 사 왔기 때문이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남동생은 ‘유희왕’이라는 만화에 푹 빠져있었고, 엄마는 이왕 시내에 간 김에 늦둥이 아들에게 필요한 운동화 사 와야겠다고 마음먹었었나 보다. 암선고를 받고도 그 무거운 걸음을 한 발 한 발 옮겨 어떻게 늦둥이 아들의 운동화를 사 올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우리 엄마는 그랬을까. 어쩜 그렇게 가족밖에 몰랐을까. 그 시절 우리 가족에게 드리운 검은 그림자에 서늘한 공포와 슬픔이 휘감았다.
남동생은 어색하게 눈치를 보며 운동화를 신어보았고, '크진 않냐 잘 맞냐'는 엄마의 말에 조용히 끄덕였던 것 같다. 일어서서 한 번 걸어보라며 애써 태연한 척하는 엄마의 마음을 얼마나 미어졌을까. 누구보다 강한 엄마였고, 지켜야 할 가족이 있는데 그 어린 아들 앞에서 운동화를 이리 저리 살피는 어미의 마음은 얼마나 미어졌을까. 그 모습이 어찌나 미어지던지 나와 언니는 엄마가 너무 가엽고 다가올 현실이 무서워 그만 꺼이꺼이 울고 알았다. 호랑이 같던 엄마는 우리가 우는 모습을 보며 애써 담담하게 “울지 마 엄마 안 죽어” 하며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말했다. 이내 엄마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리곤 엄마는 다시 한번 눈물에 젖어 무겁게 갈라지는 목소리를 겨우 짜내며 '괜찮다고, 안 죽는다고' 더 또박또박 말씀하시며 우리 달랬다. 그런데 그 말들이 마치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 듯 초연해 보여 더 가슴을 저리게 했다.
결국 엄마는 그해 여름 난소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수술을 두 번 했으며 그 해 우리 집에는 엄마의 아픔만큼이나 아주 크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항암 치료가 끝난 날이면 엄마는 꼬박 열흘을 앓아누웠다. 우리는 아빠가 해주는 서툰 음식들도 끼니를 때웠다, 주로 계란프라이와 김치볶음이 올라왔다. 소문을 들은 동네 아주머니들이 가져다주는 한 솥 가득한 정성 어린 찌개나 국으로 며칠을 먹었다. 거실까지 새어 나오는 엄마의 앓는 소리는 tv 볼륨보다 컸던 해였다. 사랑받아야 할 엄마의 관심이 필요했을 8살에 남동생은 하교 후 손을 깨끗이 씻고 엄마에게 공손하게 “학교 다녀왔습니다”하고 인사해야 했다. 엄마 품에 안겨 온갖 응석 다 부렸어야 할 나이에 남동생은 누나들의 지휘 아래 얌전히 말을 따라야 했다, 하교 후에는 방 안에 들어가서 조용히 숙제를 하고 일기를 쓰거나 했다. 친구를 맘대로 집에 데려오지도 못했고, 그 해 여름에 있던 남동생의 생일은 조촐하게 지나갔다. 당시 언니와 내가 할 수 있던 건 몇 시간씩 엄마를 정성으로 주물러주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엄마의 핼쑥해진 얼굴을 보고 있자면 너무 낯설어 무섭기도 했다. 그리고 정겹던 엄마의 살결 냄새는 이미 사라졌고 약처럼 쓴 냄새가 엄마의 방에 가득 풍겼다. 몇 시간이고 엄마를 연신 주무르다 눈물이 주체 못 하고 흐르기도 했고, 잠든 엄마 옆에서 겨우 겨우 눈물을 주워 담기 일쑤였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났고 이내 엄마도 건강해지는 듯했었다.
8년 뒤 엄마의 암수치는 크게 올랐고, 결국 다시 항암 치료를 받기로 예약한 몇 주 전부터 복수가 찼다. 복수가 차기 시작하면서 엄마는 제대로 식사도 못했고, 똑바로 누워 잘 수도 없었고, 대변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점점 불러오는 엄마의 배는 마치 임산부만큼이나 컸고 단단해져 갔다. 그 계절도 뜨겁던 7월이었고, 엄마는 다시 아파만 갔다. 가족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돌았고 엄마는 마치 본인의 죽음이 다가왔음을 아는 듯 흘리듯이 유언을 말하기도 했다. 결국 잡아둔 예약 날짜에 다다르기도 전에 엄마는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고 응급실로 먼저 행해 병실에 들어갔다. 당시 여름 방학 기간이었던 내가 엄마의 곁을 내내 지켰었다. 늘 재발과 항암치료를 반복했기에 이번에도 전과 같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단지 컨디션이 좋지 않아 항암 치료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치료받을 날을 기다렸다. 당시 내 나이 23살이었고, 담당의사는 회진 때 와서 잠든 엄마의 얼굴을 보고 별 말이 없었고 나를 조용히 불렀다.
병실 밖에서 의사는 다른 보호자는 없냐며, 애 띤 내 얼굴을 보며 말문을 잇지 못하는 눈치였다. 엄마가 가망이 없다며, 슬슬 마음에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고 잘 못 들었다는 표정으로 덩치 큰 의사를 당황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엄마가 컨디션이 좋아지면 곧 치료받고, 다시 괜찮아져서 퇴원할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어째서 엄마가 가망이 없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내 머리와 상식으로 한 참을 정리하고 이해한 뒤 말했다.
“선생님 그러면 엄마가 밥을 잘 먹고 컨디션이 돌아오면 다시 항암치료 하면 되지 않나요?
그러면 다시 괜찮아지는 거 아니에요?”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목이 점점 메어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시 한번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하려다 그만 눈물이 울컥 터져 나왔다. 그 당시 내가 나는 의학적 지식이든 뭐고 간에 항암치료를 받으면 무조건 괜찮아진다고 믿었던 나였다. 결국 선생님은 조용히 내 어깨를 두드리고 아버지께 말씀드리라고 말했다. 복도에 서서 한 참을 고개 숙여 울었다. 그 여름이 생애 가장 뜨겁고 서늘했던 해였다. 옥상에 가서 아빠와 언니에게 이 내용을 말하며 나는 엉엉 울었고, 언니는 그 의사 미친 거 아니냐며 격하게 화를 냈다. 그리고선 눈물 닦고 엄마 옆에 가서 지키라고, 그리고 절대 엄마한테 티도 내지 말라고 나를 고쳐 세웠다. 나는 부은 얼굴을 식히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씩씩한 척 연기하며 병실로 향했고, 내가 온 걸 느낀 엄마는 자다 깨서는 의사가 뭐라고 하더냐며 물었다. 나는 일단 엄마가 밥을 잘 먹고 컨디션이 좋아져야 치료받을 수 있다고 했다며 뭐라도 드실 수 있게 하라고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엄마도 본인의 죽음이 곧 다가왔음을 느꼈던 것일까,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가만히 잠을 청하는 듯했다. 그런 엄마 곁에서 엄마를 조금이라도 웃게 하고 싶어서, 내 남자친구는 어떠니 저쩌니 하면서 실없는 얘기를 연신 조잘거렸다. 그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밤 새 복수가 차서 당기는 배가 아파 잠 못 드는 엄마의 배를 연신 쓰다듬으면 하나님 제발 우리 엄마 안 아프게 해 주세요, 제발 우리 엄마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하면서 읊조리는 거 말고 엄마를 위해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었다. 보통 두 시간 가까이를 엄마의 배를 쓰다듬고, 등을 주물러드렸다. 그렇게 하다 보면 손바닥은 지문이 옅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붉게 부었다. 그리고 검지와 엄지는 시큰거리고 아파서 구부릴 때면 미간이 찌푸려지기도 했다.
아파서 연신 앓던 안쓰러운 엄마는 내 기도를 자장가 삼아 겨우겨우 잠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병실에서 한 달 반을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지내던 엄마는 결국 숨을 거두었다. 그 여름을 길고 긴 장마와 무더위를 모두 지세고 엄마는 곁을 떠났다. 같은 병원, 같은 병동에서 8년을 치료받은 엄마의 죽음 앞에,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 병동의 수간호사와 간호사들의 묵례를 받으며 하얀 천에 덮여 엄마는 비로소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내내 집으로 가고 싶다고 하셨는데, 결국 숨은 거둔 후에야 엄마는 고향 땅을 밟으셨다. 당시 아빠가 엄마의 얼굴 매만지며 이만 쉬라고, 이제 그만 집에 가자하시며 우시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연하다.
엄마의 사랑이 늘 그리운 나는, 늘 엄마의 관심과 애정을 원했던 나였다. 서른이 넘고서야 내가 엄마의 사랑에 이리도 목이 말랐었구나, 엄마의 애정에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아픔을 느끼며 살았구나 느꼈다. 늘 차갑고 엄했던 나의 엄마. 불러도 닿지 않는 이름.
보고 싶은 내 첫사랑, 나의 세계, 나의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