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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난 Oct 22. 2019

6. 대학에서 죽어나기




    21일 현재, 누워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탓이다. 급격하되,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다. 모든 통증은 예견되어 있었다. 나는 몇 시간씩 앉아 있으면 안 됐고, 주말에 친구를 만나러 나가면 안 됐다. 상태가 악화될 게 분명했으니까. 그래도 브런치 작가가 됐으니 글을 쓰고 싶었고, 꼴에 휴학생이라고 번화가에 나가 맛집에 들르고 싶었다. 그 욕심의 결과가 이거다. 한두 시간 간격으로 요의와 통증이 찾아들어 깨고 있다. 앉아있을 수도 서 있을 수도, 그렇다고 해서 누워있어도 편하지 않은 불쾌감이 온몸을 찔러온다.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이었나?


    섬유근육통 환자의 많은 욕구는 욕심이자 욕망이 된다. 건강한 음식을 먹고 적당량의 수면을 취하며,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적절한 치료(그놈의 꾸준한 운동) 하지 않는 모든 환자는, 욕심 많은 환자가 된다. ‘그러니까 아프지’라고 선생질당한다. 아, 당연하게 계몽당하는 질환자들. 나보다 나은 것이 고작 운 밖에 없는 이들에게 ‘그러니까 그렇게 아프지’따위 소리를 듣는 삶! *자기 연민 타임* 지겹고 지겹다. 흡연자와 음주자가 그런 소릴 지껄이면 (비)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바라건대, 남의 건강에 참견 말고 걱정이 되면 병원비나 보태라.


    나는 아프더라도 사람 살고 싶었다. 이런 얘길 하는 꼴을 보니 아직 덜 아픈지도 모르겠다. 구독자가 생긴 김에 잠을 쪼금 줄이고 글을 쓰고 싶었고, 침대에서 요양하고 폼롤러로 운동하고 온욕땡땡이친 뒤 하루쯤 번화가로 놀러 나가고 싶었다. 그렇다고 모든 걸 내려놓진 않았다. 술과 담배를 즐기아프라고 고사를 지낸 것도 아니다. 세끼 챙겨서 먹고 약도 꼬박꼬박 복용했는데!


    그게 바로 욕심이었다. 지금 몸이 통증으로 말고 있다.


    이번 화는 공교롭게도, 내가 대학에서 욕심부린 이야기를 하게 될 듯하다. 4화에서 말했다시피 나는 아픈 것을 알았고, 더 아파질 것을 알면서도 무리하며 학교에 다녔다. 그랬더니, 본래 나약한 정신까지 볼모로 잡아가며 몸이 시위했다. 학교를 그만 다니라 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굴복한다. 이는 굴복하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 중도 휴학을 저지르는 날까지. 실은, 누구라도 좋으니 너는 최선을 다했다고 말해주길 바랐다.


    이조차 욕심일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을까?





    삼 밝히자면,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있다. 이 질환은 대중교통 승에 불편을 주는 것은 물론, 카페에서 우유와 간 얼음이 들어간 음료 주문을 주저하게 하는 주범인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커피조차 마시지 못한다. 카페에서 시킬 메뉴가 없어 늘 오래 고민한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하 과민성 대장)은 신경이 곤두서면 심해진다. 그래서 항상 학기 중엔 사물함에 편의점 캔 죽을 구비해두었다. 남들이 점심을 고민할 때 나는 학생 식당의 전자레인지에서 죽을 데웠다. 오늘 점심 뭐 먹지 같은 고민은 사치였다.


    올해, 사물함은 없어도 과민성 대장은 재깍 왔다. 먹으면 먹는 대로 쏟아내며 살이 내리기 시작했다. 꼬박꼬박 1달에 1kg씩 체중이 빠졌다. 본래 트레이너가 유산소를 시키지 않을 정도로 체지방이 부족 몸이었다. 체중이 감소하니 몸이 곡을 했다. 진통제 진경제 지사제 정장제. 비슷비슷한 발음의 알약들. 내과에서 처방받아 먹어도 죽을 끊으면 다시금 화장실에 들락거렸다. 수업 중간에 녹음을 켜고 화장실로 달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곤 했다. 얘 화장실 갔어요, 라고 대변해줄 만한 친구가 없어서 불안했다(우습게도, 그런 불안이 과민성 대장을 유발한다). 중에 B정신과 약물이 메스꺼움을 불렀다. 과제는 몰아치고 몸은 야위고, 체력이 달려 어지럼증이 동반했다. 죽겠다고 생각하며 죽을 퍼먹었다. 아주 죽을 맛.


    학교에 한 번 무단결석한 이후 쌓아왔던 강박이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졸린 정신과 약물을 핑계로 지각했고, 허리를 숙일 수 없어 머리를 못 감겠단 핑계로 지각했고, 대장이 과민하시단 핑계로 지각했고, 지각했다. 가끔은 결석했고 수업이 남았는데 귀가하기도 했다. 힘들어서 그랬다. 힘들어서 그랬다고 적는 것이 지금도 몹시 두렵다. 내 출결 상황을 보고, 학교를 다니고 싶긴 했니? 라고 생각할 누군가에게, 단호하게, 당연하지! 하고 답할 자신이 없어서 그렇다. 매일이 아프고 힘들었다. 내일 수업에 가야 한다는 생각 만으로도 새벽에 공황이 왔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공벌레처럼 몸을 딱딱하게 만 채로 버텼다.





    요통은 날로 심해졌다. 시판하는 진통제를 최대 용량까지 복용하면 잡히던 통증이 어느 날부터 잡히지 않았다. 3월 초까지만 해도 ‘오늘은 진통제를 먹어서 멀쩡해요!’라고 트레이너에게 상태를 보고했었다. 그러나 진통제로 사라진 통증이란 가림막으로 가려놓은 장애물과 같아서, 당장 보이지 않을 뿐 사라졌다할 수 없다. 통증을 못 느낀다고 어려동작을 갑자기 해낼 수는 없. 나는 단순히 아픔을 못 느낄 뿐, 여전히 체력이 약하고 근육량이 부족한 허접이었다.


    그러나 아픔을 못 느낀다는 것은… 정말 정말 중요한 거였다. 장애물을 가릴 수 있는 가림막이 얼마나 귀중한지, 그땐 미처 몰랐다.


    시판 진통제(덱시부프로펜, 이부프로펜, 아세트아미노펜 등)를 먹어도 더는 요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당연히 대학생활 난이도도 수직으로 상승했다. 잠시 설명하자면, 나의 대학 수업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1시간 30분짜리 주 2회 수업과 3시간짜리 주 1회 수업. 내 경우 전자와 후자의 비율이 비슷했고, 후자를 듣는 게 힘들었다. 교수님 재량으로 쉬는 시간이 생기기도 하지만, 어쨌든 3시간 동안 강의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 고문에 가까웠다.


    강의 중 10분에 한 번씩 시각을 보았다. 휴대폰 사용을 금하는 교수님 수업에선 그마저도 못 하고 동동거렸다. 신성한 배움의 장에서 유익한 수업과 훌륭한 교수님을 앞에 두고,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생각했다. 허리 아프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아픈 것 같은데. 수업 언제 끝나지? 아직 n분 밖에 안 지났다고? 말도 안 돼. 설마 오늘은 안 쉬고 가는 건 아니겠지? …양아치가 따로 없다. 오른손으로는 펜을 쥐고 왼손에는 허리를 쥔 채, 뭉친 근육을 주무르며 수업을 들었다. PT에 가면 이상하게 왼쪽 허리가 덜 굳었네요, 소리를 들었다. 당연하죠, 몇 시간을 주물렀는데!


    통증이 한계에 다다랐을 무렵, 교수님이 말한다. 15분 쉬었다가 가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빈 의자를 찾는다. 그리고 네다섯 개를 연달아 붙인다. 누울 자리를 만든다. 아이고 소릴 내며 드러눕는다.


    대화를 트고 지내는 동기 B가 물었다. 언니, 어디 아프세요? 나는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어떡해요, 빨리 나으세요. 깍듯한 걱정이 돌아왔다. 내가 고맙다고 말했다. B는 좋은 사람이었다. 내가 불현듯 화장실로 사라졌을 때, 언니 화장실 갔다고 말해줄 몇 안 되는 학우이기도 했다. 나는 줄곧 전형적인 아웃사이더 생활을 했고, 입학 이래 학교 근처에서 식사를 같이 한 사람을 손에 꼽을 수 있었다. B는 그중 한 명이었다. 우리는 종종 수업이 끝나고 마늘치킨이나 뼈해장국을 먹었다. 그런 B에게 끝까지 내 통증을 얼버무려야 해서 슬펐다.


    강의 사이 시간이 뜨면 여학생 휴게실로 얼른 가서 누웠다. 다음 강의에서 앉아있기 위해선 쉬어야 했다. PT에서 배운 스트레칭을 했다. 주변 학우들이 이상하게 보건 말건, 당장급했다.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표현을 한 차례 썼는데, 그때 내 상황도 그랬다. 통증은 그 정도 휴식으론 가라앉지 않았다. 딱 다음 수업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만 완화되었다. 울고 싶었다. 다음 수업은 무슨 수로 버티지? 심지어 모든 수업이 끝나면, 집까지 2시간을 들여 하교해야 했다. 하교는 절대로 누워서 못하는 일이었다.





    비통증성 증상도 이때부터 심해졌다. 대표적으로 ‘골반이 뻣뻣해지는’ 증상이 일상을 망쳤다. 지금도 지장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 보행에 이상이 오니까. 고관절이 마비되는 감각이 들며 걸음이 느려지는 거다. 수업과 수업 사이 쉬는 시간은 15분이었다. 연강으로 넣은 수업이 많아서, 쉬는 시간을 이동시간으로 쓸 때가 많았다. 원래는 학교가 작아서 15분이 부족할 일이 드물었다. 화장실을 들렀다가 음료수까지 뽑아도 가장 멀리 떨어진 두 건물 사이를 여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거리였다. 단, 몸이 건강하다는 가정 하에. (모두가 건강하리라는 가정 하에 존재하는 모든 시스템이란, 얼마나 기만적인가?)


    과민성 방광 때문에 강의 사이 꼬박꼬박 화장실을 들르지 않으면 절박뇨가 찾아왔다. 걸음이 느려지니까, 화장실을 들렀다가 건물을 이동하면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말 그대로 ‘마비되는’ 감각이라, 아픈 것을 참고 애쓴다고 빨리 걸을 수도 없었다. 나는 임신부처럼 허리를 받치고 다리를 벌린 채로 뻣뻣하게 걷곤 했다. 그래도 남들보다 느렸다. 오르막길이 아득했다. 교양관이 이렇게 멀었나. 편의점 잠깐 들를 시간도 없었다. 가까스로 시간 맞춰 도착하면 이미 대부분 자리엔 가방이 있었다.


    내가 무능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절망감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의자에 등받이가 없는 식당에선 식사할 수 없다는 것. 막 들어오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뛸 수 없다는 것. 아픈 허리를 붙들고 다음 열차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 횡단보도의 신호가 짧아서 간신히 수 초를 남기고 건넌다는 것. PPT를 만든답시고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있을 수 없다는 것. 요통과 목, 어깨 통증이 심해서 3시간짜리 수업을 들을 수 없다는 것. 2시간 거리의 통학은 더더욱 할 수 없다는 것. 이제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할 에너지조차 고갈되었다는 것.


    그러므로 더는 학교에 다닐 수 없겠다는 것. 최선의 판단이었다.





    4월이었다. 일교차가 심하고, 벚꽃이 흐드러지는 계절. 중간고사 이전에 서류를 제출해야 중도휴학을 할 수 있었다. 재빨리 준비를 해야 했는데 몸도 마음도 엉망이었다. 통증과 불안이 겹쳐 일상처럼 악몽을 꾸었다. 약이 없으면 잠들지 못했다. B정신과 의사는 휴학 후 안정병동(=보호병동, 前폐쇄병동)에 입원할 것을 권고했다. 입원 의뢰서를 여러 장 받았다. 진단명은 혼합형 불안 및 우울병 장애, 중등도 우울에피소드. depressed mood, anxiety, suicide ideation 심하여 안정병동 입원치료 필요합니다.


    나는 전문가의 의견을 반만 들었다. 입원은 거절했고, 휴학은 하겠다고 했다. 중도휴학을 준비하며 생각했다. 나는 질병에게 졌구나. 그러나 그 또한 반만 맞는 말이었다. 나는 그때만 질병에 패배한 것이 아니다.


    섬유근육통은 언제나 나를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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