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는 중도휴학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과정을 쓸 예정이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6화를 읽고 (감사하게도) 공감해주시고 (정말 감사하게도) 많이 슬퍼해주셔서 급하게 노선을 틀었다. <죽는 날까지 죽도록>은 소재만으로 충분히 무겁지만, 그렇다 해서 독자를 울릴 생각까진 없었다. 진심이다. 왜냐하면, 감정 소모가 심한 글은 다음 화를 읽기 힘드니까. 나는 끝까지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 최종화까지 꾸준히 읽히고 싶다. 그러려면 감정적으로 힘들기만 해선 안 된다. 소정의 재미가 있어야 다음을 기다린다.
내 개인사를 유희로 소비해도 좋으니까, 에세이를 끝까지 읽어달라. 이게 내 스탠스였다. 그런데 독자분들이 생각보다 너무 상냥해서… 6화에 응원 댓글이 많이 달렸고… 눈물을 흘렸다고 댓글 달아주신 분도 계셨고… 엄마가 전화를 걸어서 울었고… 나는 감동과 함께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살짝 쉬어가는 이야기를 씁니다. 외전이라고 생각하고 읽어주세요.
일곱 번째 글이다. 제목을 좋아하는 노래 가사에서 따왔다. <NCT U-일곱 번째 감각>. 원래 가사는 ‘긴 잠에서 깨어난 내 일곱 번째의 감각’인데, SM 엔터테인먼트의 허락을 맡지 않고 개사했다. 본래도 예민했던 오감이 병을 얻고 나서 어마어마하게 예민해졌다.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전부. 더해서 날씨를 예지하는 감각(흔히 노인들이 내일 비가 오려나 무릎이 쑤신다고 하는 육감)과, 통증에 대한 직감까지 생겼다. 합쳐서 일곱 개.
통증에의 직감. 환자가 아니라면 무슨 소린지 감도 안 잡힐 수 있다. 반대로 섬유근육통 환자라면 바로 아! 하고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거 좆됐다!’하고 뒷목이 서늘해지는 그거다. 앉아있다가, 걷다가, 스트레스받을 때, 어쩌면 아무 이유도 없이. 통증이 곧 온다고친절하게도 초인종을 눌러주는 감각… 그게 내 일곱 번째 감각이다. 초능력에 가깝다. 나는 시간 정지 능력이나 순간 이동 능력을 갖고 싶었지, 이런 걸 갖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쓸데없이 민감한 칠감七感을 이미 가졌다.반납 불가. 처음엔 내가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다. 내가 이상해서 과민 반응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섬유근육통 카페에 검색해보니 놀랍게도, 나랑 똑같은 증상에시달리는 환우가많이 있었다! 내 생각에는 섬유근육통 환자가 통증에 대한 지각이상이 와서 정상인은 자극으로 느끼지 않는 통증을 자극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정상인은 자극으로 느끼지 않는 빛, 소음, 냄새, 맛, 질감을 자극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다들 아파서 예민하기도 하고.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다. 아직 현대의학이 파헤치지 못 한 질병인걸. 다만 ‘헉, 저도 그래요!’, ‘여러분들도 그러셨어요?’같은 대화를 읽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더라.
가장 불편한 것부터. 나는 청각이 심하게 예민하다. 귀를 막을 이어폰이 없으면 외출하기 어렵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겐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할 정도다. 평범한 소리에도 크게 반응해서 상대가 놀라니까. 3개 정신과를 거치며 내내 호소했던 증상도 ‘청각과민’이었다. 정확한 병명은 아니다. 실제 청각과민증은 ‘작은 소음(껌을 씹는 소리나 시계 초침 소리 등)에 큰 불편을 느끼는’ 병이던데, 내가 겪는 청각과민은 약간 다르다. 나는 모든 소리를 크게 듣는다. 볼륨 조절을 실수한 것처럼, 남들은 5로 듣는 소리를 10으로 듣는다. 차도 옆을 지나갈 땐 정신을 못 차린다.
다종다양한 불편이 따라온다. 강의실에서 마이크를 쓰는 교수님이 있었다. 교수님이라기보다 성악가의 재능을 가진, 성량이 좋은 분이었다. 강의를 듣다 보면 말 그대로 ‘소리가 커서’ 미칠 지경이었다. 텔레비전의 볼륨을 지나치게 올려놓고, 못 줄이게 하는 고문에 처한 느낌.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가 평온했다. 길에서는 이어폰을 꽂을 수 있지만,교수님 앞에서 불경하게 귀를 막을 수는 없었다. 턱을 괴는 척중지로 한쪽 귀를 슬쩍 막고 수업을 들었다.
공중 화장실에서 핸드드라이어를 쓰지 못한다. 소리가크기 때문이다. 페이퍼타올 없이 핸드드라이어만 비치된 화장실에선 물기를 제거하지 못하고 나온다. 손을 말리는 동시에 귀를 막을 수없으니까. 핸드드라이어 수준의 소음은 이어폰으로 재생한 음악을 뚫고 들어온다. 가끔 노후된 탓인지 유난히 시끄러운 핸드드라이어가있다. 쌔애앵,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고막을 찌르는 듯하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형체 없는 흉기에 찔리는 것 같다. 아프고 무섭다.
집에서 자주 반복하는 몇 마디가 있다. “조금만 작게 말해 줘”, “텔레비전 소리 좀 줄여줘(혹은, 텔레비전 끄면 안 돼?)”. 심지어 할머니는 귀가 어두워서 작게 말하면 안 들린다. 그런데 나는 크게 말하면 귀를 막아야 한다. 부모님은 아마 환장스러울 것이다. 그래도 한 번 짜증을 안 낸다. 좋은 분들이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섬유근육통이고 우울증이고, 원인이 어떠하든 결과적으로 내가 주변인을 피곤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배려받는 건 감사한 일이다.
두 번째는 미각이다. 매운맛과 쓴맛에 민감하다.매운맛은 ‘통각을 느낄 정도의 자극성이 있는 맛’이라고 한다. 통증에 예민한 몸이 매운맛에도 예민하게 구는 걸까? 어렸을 때부터 매운 음식을 더럽게 못 먹었다. 김치를 더운물에 빨았고, 매운 걸 못 먹다니 한국인이 아니란 얘기도 종종 들었다. 상식과는 달리 자랄수록 못 먹게 되어서, 섬유근육통이 한창인 지금에 이르러서는 음식에 고춧가루를 첨가했는지 감지할 정도로 민감해졌다.
한국에서 매운 음식을 못 먹는 건 끔찍한 일이다. 외식을 좋아하는 내게는 재난과 다를 바 없다. 한국인들은 일단 매운 음식에 맵다는 표시를 잘 하지 않는다. 점원에게 ‘이거 매워요?’라고 물어보면 맵지 않다고 답한다. 먹어보면 맵다. 다른 곳에서 ‘이거 매워요?’라고 묻는다. 점원은 해맑게 말한다. ‘신라면보다 안 매워요!’ 나는 속으로 불평한다. 무슨 소리야? 신라면은 내게 화학무기에 가까운 물질이다. 나는 김치도 잘 못 먹는다. 한국인 기준 ‘매운 음식’의 허들은 너무나도 높고… 식당에 가면 모든 메뉴가 내 기준에서 매운 음식일 때도 많다.
오랜 배신에 걸쳐 배운 팁이 있다. [리빙포인트] 식당에서 맵기 정도를 물어볼 때, ‘이거 2살짜리 애기도 먹을 수 있어요?’라고 물어보면, 진실된 맵기를 가르쳐준다. 아직까지 이 방법으로 실패한 적은 없다.
쓴맛은 많은 사람이 싫어하겠지만, 나는 커피를 써서 못 마신다. 카페인이 들어있어 수면을 방해하고 과민성 방광을 악화하고 위장질환을 유발하고 어쩌고 저쩌고… 여러 가지 이유를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커피가 써서 싫다. 내게 커피는 졸라 쓴 물이다. 친한 언니가 커피에 빠삭해서, 어느 프랜차이즈는 커피가 맛있고, 어느 프랜차이즈는 커피가 재앙처럼 맛없다는 이야기를 해준 적 있다. 나는 경청하면서 속으론 모든 커피는 똑같이 쓰다고 생각했다. 음, 콩 태운 물. 태웠으니까 당연히 쓰지. 덜 쓰거나(카페라떼) 더 쓰거나(아메리카노) 더럽게 쓰거나(에스프레소)…
시각과 후각이 예민해지긴 했지만, 다른 부분에 비하면 불편하다고 말하기조차 민망한 수준이다. 빛에 민감해져서 방에서 형광등 켜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가끔 상태가 안 좋은 날만, 불을 끄고 커튼을 꼭꼭 치고도 새어드는 햇빛이 자극적이라 이불을 덮어쓴다. 후각은… 단적으로, 비린내를 못 맡게 되었다. 호불호가 심한 냄새(이국적인 향신료 등)에도 큰 불편을 못 느꼈는데, 어느 순간부터 생선 비린내 따위가 역하게 느껴졌다. 생선 반찬이 올라오면 못 먹겠다고 투정한다. 한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할머니, 죄송합니다.
‘예민한 사람’에 관한 도서가 요 몇 년간 많이 출판되더라. 보통 성격 상의 예민을 말하는 거지만. 어찌 되었든, 예민한 사람으로 사는 건 피곤한 일이다. 나는 외출을 싫어한다. 절대로… 절대로… 부를 친구가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자극이 한 번에 쏟아지기 때문이다. 모든 자극으로부터 나를 방어하기는 불가능하며 나는 언제나 무방비하다. 그에 반해 내 방은 지극히 예상한 상황만 벌어지는, 지루하고도 안정적인 공간이다. 무엇보다 조용하고 어둡다. 괜히 내가 방에 틀어박혀있는 게 아니다.
‘칠감’을 갖고 사는 삶이 나쁘지만은 않다. 솔직히 단점이 훨씬 크지만, 장점도 있다. 이를테면, 매운 음식을 안 먹으니 자연스럽게 위장 건강을 지킬 수 있다. 남들이 힘을 들여 커피를 끊을 때, ‘저는 원래 커피를 안 마시는 데용?’할 수도 있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발소리를 듣고 ‘누군가 온다!’고 알아차릴 수도 있다. 가족일 경우 누구인지도 맞출 수 있다. 세상에, 우리 집은 초인종도 없는데 내가 방범 기능을 한다! 와, 너무너무 좋다!
맞다, 지금 떠올랐다. ‘청각과민’ 때문에 과거에 이비인후과를 내원한 적이 있다.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니까, 내 귀에 기능적으로 이상이 있다고 여긴 거다. 청력 검사 결과는 당연히 정상이었다. 이비인후과 의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게, 원시시대였다면 아주 좋은 능력이었겠죠… 소리를 크게 듣는다는 건, 사냥이나 이런 곳에 유리할 수도 있고요… 근데 환자분이 현대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이게 참…”. 그리고 진료는 끝났다. 픽션 에세이라서 거짓말 같죠? 때때로 의사들은 상상도 못 할 헛소리를 한다. 하하. 나도 이게 죄다 픽션이면 좋겠다.
하여튼 칠감을 가진 채 살거나,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일상에 불편을 겪는 모든 ‘예민한 사람’을 응원한다. 그리고 나는 통증에의 직감이 느껴졌으므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