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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료료 Jul 09. 2024

요하네스 베이메르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진주를 돼지에게 던진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진다

한 소녀는 일상의 전망과 비현실에 떠 있는 소녀의 눈을 벗겨낸다. 삭제된 이질적인 시간들이 열린다. 미묘한 표정이 명확한 분위기로 살아낸다. 분리된 공간에 필수적이다. 목마른 제스처의 부유함을 지킨다. 고요히 철저한 의식을 수행한다. 절차가 있는 소유의 갑옷을 착용한다. 쓸모없는 일을 현대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우므러진 입술을 펴내어 뱉어내려 한다. 솎아내려는 그 시행착오에 치밀한 계획에 처연해졌다. 오래된 기억에 없는 소녀와 오래된 기적이 없는 소녀가 마주 본다. 소녀의 멀어진 길에 다물어지지 않는 시선으로 걷기 시작한다. 어둠에 임박한 거리에서 연결고리의 동행을 꿈꾼다. 게가 거품을 토하듯 북적이면서 느물거린다. 빛의 능숙함은 원근법을 떠안고 있다.     


성장을 교감하는 방법은 모두가 똑같지 않다. 어느 대상의 이미지마다 몰입 방식이 존재한다. 저마다 살아가는 방법을 그리는 청중이 있다. 과연 진짜와 가짜를 갈구하는 것이 중요할 까? 필요 이상의 돈이나 물건을 쓰거나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사치라 한다.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 있기도 하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진다.’라는 속담이 있다. 아무런 보람도 바랄 수 없는 쓸모없는 일을 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아니, 돼지도 진주 좋아할 수 있잖아?” 가치를 모르는 자에게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 하여도 고마워하기는커녕 자기에게 돌을 던졌다고 화를 낼 수도 있다고 한다. “아니, 화낼 수도 있지 않아?”라고 말하게 된다. 속담은 비유적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뜻에서도 그와 다를 바 없이 터득해야 한다. “아니, 속담이라고 다 맞는 것은 아니잖아?”     

사실 가짜든 진짜든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고민하지 않는다. 다수의 생각이 늘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대화를 싫어하지 않는다. 부정과 대답이 빠르다. 하지만 새로운 자취를 감추고 싶지 않은 감정에 한 발짝 나설 뿐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고개를 두드리는 것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엉클어지지 않는 단호함의 완벽한 배치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두 번의 붓놀림으로 진주를 드러낸다. 왼쪽 상단과 아래쪽 화이트 페인팅의 부드러운 반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너무나 큰 진주는 나의 상상에서 맡기게 된다. 경로를 바꾸게 된 빛의 고리도 어둠 속으로 배여 들었을까? 색채를 쏟아내는, 무수히 그것을 맞아내는 일을 기억해 본다. 샤워부스 안의 물줄기 형체들은 마찰되며 자국을 남긴다. 내 몸에 부딪혀 부서지는 순간이 그렇다. 좋은 보통을 찾아 쉽게 응하려는 방법은 무시해도 되는 순간을 말한다.   

  

어둠의 분비는 때론 알맞게 번거롭다.

조개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분비물을 내뿜는다고 한다. 외투막을 자극하여 분비된 진주질이 모래알을 겹겹이 에워싸서 생기는 것을 진주라 부른다. 이때 진주가 어떤 물질을 분비하느냐에 따라 진주의 색이 달라진다. 관심이 없는 것과 관심이 있는 것의 차이는 번거로움의 사치이다. 가려진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의 고리의 완성은 감정이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방법은 제시간에 자고, 제시간에 밥을 먹는 것이다. 제시간에 운동을 하며, 제시간에 사회활동을 해야 한다. 나는 오롯이 감정에 휩쓸리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둡고 습기가 찰 때 분비물이 번식된다. 그 정도가 알맞게 모양을 갖추게 된다. 진주를 찾으려면 물속에 들어가야 한다. 터번을 쓴 소녀는 베르메르 꿈에서 어깨너머로 그의 현실을 들여다본다. 값비싼 안료를 찾아서 당신을 에워싸는 그 분비물이 빛을 찾아간다.     


17세기 네덜란드 소녀들은 터번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베르메르는 주로 특정 성격이나 유형을 나타내는 머리를 연구하는 트로니를 많이 그렸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렘브란트는 1630년경 네덜란드 미술에서 트로니를 대중화했다. 그는 수십 개의 모자를 만들었다. 엄마는 머리숱이 작아서 고민이 많으셨다. 터번으로 비슷한 스타일링을 하신 것을 본 적이 있다. 17세기, 터번, 트로니, 모자, 엄마를 줄지어 어려운 지경에 빠뜨리고 있다. 그녀는 17세기의 신비로움에 감춰진 명화와 같다. 설명이 되는 부분과 되지 않는 부분이 늘 존재한다.  

        

나의 사랑하는 딸들에게

엄마를 내 인생에서 배제한다면 내 삶은 가사 없는 음악으로 들리지 않을까? 언젠가 나의 딸들도 나를 물리쳐야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비밀을 즐기는 것이다. 지극히 작은 일들에 정복당하는 빛을 내기도 한다. 그런 꿈을 꾼다면 멈춰있는 그녀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바라보게 된다. 나의 사랑하는 딸들에게 그 고요함을 선물한다. 가사가 없는 나를 물리쳐내어도 날개가 돋친 사자가 여자로 나타나 수수께끼를 내어도 멈추지 않고 미술을 느껴야 한다.     

베르메르는 델프트의 스핑크스라 불린다고 한다. 엄마는 나에게 신화와 같다. 스핑크스는 신전의 입구에 세운 석상을 말한다. 이집트에서는 왕의 권력을 상징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이기도 하다. 까닭 없이 저절로 일어나는 불은 없다. 그녀에게서 그 뜨거움을 느낄 때가 있다. 때로는 부드럽고, 거칠기도 한 질감이 우리의 관계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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