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과 봄 사이에
글을 적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요즘 더 자주 느낀다. 적는 걸 좋아하지만, 그 마음에 날개를 다는 일은 늘 어렵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꾸 이야기 속 인물을 만들어, 그 감정 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끝까지 느끼지 못한 감정을, 주인공이 다른 시공간을 대신 겪는 상상을 했다.
그렇게 시작된 밤이었다.
나는 책상 위에 앉아 있었다. 시계는 창문 사이로 자정을 넘겼다. 차갑고도 은은한 바람이 불어왔다. 오래된 시간의 냄새에 이끌려 달빛이 점점 사라지는 곳으로 향해갔다.
눈을 다시 떴을 때, 나는 다른 밤의 다른 사람으로 앉아 있었다. 불빛은 방 안을 온전히 밝히지 못하고 있었다. 방 안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등을 곧게 세운 채 앉아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종이가 들려 있었다. 이미 여러 번 접혔다 펼쳐진 흔적이 보였다. 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지만,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다. 그녀의 밤은 꽉 다물어진 입술처럼 아무 소리도, 아무 기척도 느낄 수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붓길은 똑같은 문장을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있었다. 다 쓰이지 못한 문장들이 종이 위에 떠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잠들지 않았다. 아니, 잠들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혹시라도 잠이 드는 순간, 기다리고 기다리던 님이 돌아올까 봐. 혹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인정하게 될까 봐.
나는 그 문장을 대신 끝내 보고 싶었다.
그 순간, 바람이 더 강하게 불었다. 등잔불이 꺼졌다. 그녀를 비추던 마지막 빛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차갑게 식어버린 어둠뿐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을 때, 눈부신 달빛이었다.
달빛으로 환하게 비치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가지 끝마다 매화의 봉우리가 매달려 있었다. 그 아래에 봄을 쫓아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 서 있었다.
그녀를 만났다.
그 매화를 바라보며 노래를 이어갔다.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단단했다. 전의 밤과는 전혀 다른 향기였다. 내가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믿고 있었기에 그 시선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아무 상관없다는 듯, 그녀는 내 어깨 위에 내려앉은 매화 꽃잎을 바라봤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살폈다. 나는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나를 담으며 흔들리고 있었다.
뒤에서 작고 작은 아이가 달려왔다.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나무 아래에 가야금이 놓여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매화타령
좋구나 매화로다 어야디야 어허야 에- / 디여라 사랑도 매화로다
좋구나 매화로다 어야디야 어허야 에- / 두견아 울어라 좋구나 매화로다
인간 이별 만사 중에 독수공방이 상사난이란다
안방 건너방 가로닫이 국화 새김의 완자문이란다
어저께 밤에도 나가 자고 그저께 밤에도 구경 가고 / 무삼 염치로 삼승 버선에 볼받아 달람나
나무로 치면은 행자목 돌로 쳐도 장군석 / 음양을 좇아 마주 섰고 좌청룡 우백호 한가운데는
나 돌아감네 에에헤 나 돌아감네 떨떨거리고 나 돌아가노라
지리산 가루산 동구 밖에 우두커니 섰는 장승 /
사모품대를 하였구나 엄동설한 모진 바람 사시장천 긴긴 날에 / 무엇을 바라고 우뚝이 섰느냐
연주는 끊기지 않았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은 제자리였다.
나는 천천히 문장을 적기 시작했다.
밤과 봄 사이에서 그 사이 어딘가에 지금의 내가 있었다.
그녀의 문장은 다 쓰이지 못한 채, 매화처럼 남아 있었다.
그녀가 지금 시대로 와 그녀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님은 돌아와 가야금을 같이 연주하는 상상을 마지막으로 했다.
#매화타령 #상상 #미드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