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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료료 Sep 11. 2024

옆집 여자의 모르는 새

나도 모르는 새, 나는 모르는 새가 되었다.

@모르는 새_  ryO, 240911      


옆집 여자의 목소리

선물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그녀에게는 빼곡히 가득 찬 배려의 공연이 시작되듯 격조 있게 넘쳐흘렀다. 낯선 마음으로 나도 모르는 새 경계를 하게 된 과정이 떠오른다. 그녀는 내가 포항에서 세종으로 이사 가고 만난 첫 옆집 여자였다.      


삼천포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줄곧 살다가 포항으로 가서 4년을 살고, 곧이어 세종으로 다시 이사 가게 되었다. 이미 포항에서 연고가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알 수 없는 허전함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타지의 두려움은 떠올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사를 어서 끝마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부산과 포항은 불과 차를 타면 1시간 20분이면 갈 수 있었지만, 포항은 정말 새로운 지역이었다. 같은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고 하여도 억양과 말투가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질적인 것이 분명했고, 알 수 없는 호기심을 가진 눈빛에 몸은 두루마리에 거침없이 말리듯 온전한 나를 감추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말투가 어색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던 터라 익숙하기도 했지만 어떤 때는 ‘내가 말을 어떻게 하고 있지?’라며 약간의 부담스러웠던 시간을 되돌리기도 한다. “외국에서 살다가 왔어?” “쟤 말투가 왜 그래?” 지금 이 대화를 글로 옮기는 것을 보아하니 인상 깊은 기억이었던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스스로 변화될 마음이 없고, 오히려 나만의 스타일이 굳건해져 희열을 느꼈다. 무언가 통일된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인생의 오점이라도 남기는 사람처럼 절실하게 벗어나려고 행동하며 살아왔다. 타고난 것이라 이것은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함께 할 수 없이 떠나가는 무엇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때는 고독한 감정이 조여 오기도 하지만 그것도 나름 즐기며 살아왔다. 누군가의 힘에 나를 결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정말 모르는 새가 되었다

세종은 정말 달랐다. 경상도의 직관적인 말투와 사상이 상대방에 대한 아낌없는 조언이 아니라 오해의 씨앗을 안겨 올 것이라는 것은 정말 몰랐다. 이미 포항에서 조금 다른 지역의 맛을 느꼈던 터라 많이 놀라지는 않고, 그저 신세계를 발견한 듯 신기했다. 나름 알고 있던 사고에서 확장되는 것을 느끼곤 다른 장르의 음악이나 책을 발견한 것처럼 뿌듯하기도 했다. 복잡한 그들의 생각에 깊이 관여할 마음이 없었기에 했던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옆집 여자, 그녀는 정말 달랐다. 다른 장르가 아닌 다른 우주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 만난 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성인은 ‘자라서 어른이 된 사람. 보통 만 19세 이상의 남녀’, 두 번째 성인은 ‘지혜와 덕이 매우 뛰어나 길이 우러러 본받을 만한 사람’이라 사전에서 정의를 내린다.


옳은 일에 앞서 나아가는 그녀를 보며 엇나가는 것을 삶의 줏대로 살아온 나는 의문을 가지게 될 때가 많았다. 관대하지만 결코 흔들림이 없었다. 개방적이고 자유로웠지만 그녀의 고뇌와 번민이 없이는 빛이 났다고 할 수 없었다. 적다 보니 찬양하는 글처럼 적고 있어서 걱정된다. 그러면 이쯤에서 다시 생각해 보겠다.  

   

그녀는 서슴없이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처음에는 자연스럽지 못해 받더라도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할지도 몰랐다. ‘그저 고맙다는 말을 전하면 될까? 어떻게 보답하면 내 마음도 전달이 될까? 이렇게 받기만 하는 사람으로만 생각하면 어떡하지? 나도 같은 마음으로 선물할 수 있을까?’ 그녀의 선물에서 나는 정말 모르는 새가 되었다. 몰랐다. 선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녀의 진심은 어떠한 것인지를. 그래서 한 번은 그녀에게 선물을 서로 하지 말자는 말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기억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 말을 뱉고 나서 원하는 것을 내뱉었지만, 허전함이 몰려왔던 것이 사실이긴 했다.     


사유의 경련

색안경을 끼면 사람의 눈동자 표정이 보이지 않고 허점을 가려 어설픈 사람도 제법 멋있게 보이게 합니다. 대통령 경호원들이 즐겨 선글라스를 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사나운 개도 선글라스를 낀 사람은 공격하지 않는다 합니다. 표정을 읽을 수 없음이 그만큼 상대에게 두려움을 주기 때문일 듯합니다.  
    
색안경의 색깔에 따라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초록색이면 온 세상이 초록색일 것이요, 노란색이면 온 세상이 노랗게 보일 것입니다. 이것이 심리적인 문제가 되면 자신이 색안경을 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것저것 바꿔 끼면서도 못 알아챕니다. 만약 부모가 아이에게 “세상은 경쟁하는 곳이야. 어떤 수단을 쓰든 넌 싸워 이겨야 해.” 지속적으로 교육시켰다면 아이는 세상을 전쟁터, 싸워 이기지 않으면 내가 죽는 싸움터로 보게 됩니다. 고약한 색안경이지요.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 색안경을 끼고 있기에, 애써 보편성을 몸에 지니고자 하는 노력, 수행이 필요합니다. 이는 수도자만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실제로 필요합니다. 특별한 색의 안경을 끼고 있으면 세상의 다른 부분, 다른 색은 평생 맛보지 못할 수도 있으니 이 지상을 거치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불행한 일겠는지요.

(중략)                -사유의 경련, 장요세파(마산 트라피스트 봉쇄 수녀원 수녀), 백사십오 쪽.              

                                                      사유의 경련, 종이에 수묵, 김호석, 2019


최근 수묵화에 이끌려 여기저기 뒤져보는 중에 찾은 책이었다. 김호석 한국화가 ‘사유의 경련’ 그림을 하나로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여러 사람이 이야기 나누었다. 책에서 마지막 사람 장요세파 수녀의 글을 발췌했다. 조금은 두꺼운 책을 마음대로 한번 펼쳐 나온 부분이었다. 그렇게 나온 세 글자가 색안경이었다.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 그녀는 나의 자유의사였다. 무엇이든 생각했던 대로, 상상한 대로 보이기 마련이었다. 지금은 그녀를 하얀 백지로 바라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어떠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녀에게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웠다. 나에게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선물 같은 존재다. 이제는 그녀가 선물을 주면 거침없이 받는다. 그녀에게 그냥 사랑받고 싶어졌다. 복잡한 마음 집어던지고, 하얀 백지 같은 여백이 많은 그녀의 큰 우주에 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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