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의 의무' 실천 지침 두 가지
이번 유럽 여행 동안에는 호텔에서도 물을 주지 않았다. 5년 전에는 식당에서는 안 주었지만 호텔에서는 기본으로 넣어주었던 기억이 있는데 참 인정도 야박하다. 하지만 이참에 물 대신 맥주라도 실컷 마시자는 생각에 기대도 컸다. 술을 잘 마시지는 않지만 분위기에 맞춰 즐길 정도는 된다. 식당에서 물은 한 병에 3유로 내외, 맥주는 한 컵에 5유로 내외이니 아내에게 차라리 맥주 마시자고 구슬리기에도 그야말로 비교적 좋은 가격이다. “물 대신 맥주다~.”
베를린에 도착하여 점심 저녁으로 식사 때마다 맥주 한 컵씩 시켰다. 물대신, 국 대신으로 맥주 한 잔씩 시켰다. 독일 맥주가 좋다는 말은 이미 들었던 터라. 맥주 맛도 잘 모르면서 마실 때마다 “캬~! 청량하구먼!”하며 감탄사를 남발했다. “그것도 키치(Kitsci) 일지 몰라.” 아내는 나의 과한 연기를 경계하며 한두 모금 거들었다.
독일에서 맥주를 즐기는 것이 좋았다. 약간 취한 느낌이 여행의 흥을 돋워 좋았다. 소변이 자주 마려운 것까지도 좋았다. 그런데 유럽의 화장실은 이용료를 받는다. 독일은 화장실 이용료가 보통 1유로, 우리 돈으로 1500원이다. 맥주 마시고 5유로, 소변하고 1유로. 결국 맥주 값에 하루 12유로는 치르는 꼴이다. 우리 돈으로 하루 18.000원. 너무 비싸다. 아내는 맥주 대신 물로 바꾸자고 한다. 마트에서 사면 물 한 병 1.5유로 정도면 된다며. 나는 응수한다. “에이 그래도 맥주의 나라에 와서 공중화장실 값이 아까워 맥주를 참어? 물도 돈 지불하고, 소변 나오기는 마찬가진데.”
프라하에 오니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 화장실 이용료가 조금 싸다. 평균 20 코루나, 한화로 약 1200원이다. 게다가 공짜 공중 화장실도 더러 있다. 체코도 맥주가 유명하다고 한다. 맥주 소비량으로는 세계 최고란다. 나는 독일 맥주와의 차이는 잘 모른다. 맛은 냄새로 구분한다는데, 난 냄새를 잘 못 맡는다. 그래도 여긴 프라하다. “카프카도 마셨고 밀란 군데라도 마셨을 그 맥주를 맛이라도 봐야지” 하며 반주로 계속 마셨다.
프라하 사흘 째 되던 날, 몸이 너무 피곤하였다. 매일 2만 보 넘게 걸어 그런 줄 알았다. 아내는 잘 다녔지만 나만 입술이 터지고 걸음이 느려졌다. 아내는 맥주 때문이라고 하였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주일을 넘게 아침은 제외하고 때마다 맥주를 마셨으니, 약골인 내게는 과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앞으로 여행 날짜가 많이 남아있어 무사히 견디려면, 맥주를 끊어야 한다. 유럽인에겐 맥주가 음료지만 내게는 술이다. 술 대신 콜라로, 다시 콜라 대신 물로 바꾸었다. 찬 물에 보리밥 먹던 시절도 있었기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유럽 여행 마지막 이틀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잤다. 그 동네 호텔 방에 들어갔더니 물이 한 병 놓여 있었다. 공짜라고 했다. 총 15박 호텔 중에서 처음으로 물 서비스를 받았다. 물맛이 참 좋았다. 갑자기 빈이라는 도시가 달라 보였다. 인심이 살아있는 도시로 느껴졌다. 물 한 병의 효과가 그랬다. 물은 자고로 이런 것 아닐까? 우리 집에 오는 손님에게는 물이라도 한 잔 대접하는 것,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 의무 아닐까? 철학자들과 종교계에서 가끔 “환대의 의무”를 거론하는데, 그 첫 행동 지침으로 ‘자기 공동체에 오는 손님에게 물은 무조건 제공한다.’, 두 번째 지침으로 ‘누구든지 안전하고 쾌적한 화장실을 공짜로 이용하도록 한다.’가 채택되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국의 물 대접 문화와 쾌적하고 안전한 화장실 문화는 이미 환대의 의무를 충실히, 너무나 정성껏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자랑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