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평화의 길 5코스
DMZ 평화의 길 5코스는 국토 외곽을 걷는 느낌보다는 국토 내부를 깊숙이 들어와 걷는 느낌이다. 고양시 종합운동장과 몇몇 아파트 단지를 거치고, 심학산 산길과 파주 출판도시를 지나며 사람의 흔적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또 출판도시를 지나서는 길이 한강을 따라 길게 나 있지만 넓은 자유로가 사이에 끼어 있어 한강 풍광을 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걷는 사람은 길을 탓하지 않는다. 걸으며 이것과 저것을 연결하고, 전에 보았던 그것을 곱씹어 보며 의미를 찾는다. 심학산과 출판도시가 묘하게 연결되고 있음을 알았고, 한강 경치 대신 만난 ‘장준하 공원’과 ‘고려 통일 대전’에서 역사적 큰 흐름을 느껴본다.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출발하여 2시간 정도 걸으면 심학산을 만난다. 이 산 서쪽 5부 능선길을 40여 분 걸으면서 왼쪽 아래로 파주 출판도시가, 그 너머로 자유로와 한강이, 그 너머로 김포시 들판과 산들을 볼 수 있다. 나는 심학산에 얽힌 전설을 좋아한다. 처음 이 산의 이름은 심악(深岳)이었다고 한다. 관악산처럼 ‘악(岳)’이 들어간 산은 대체로 험하고 높은 봉우리가 있는 산인데, 이 산은 겨우 194m이다. ‘땅속 깊은 곳에 험준한 높이가 숨어 있을 것’이라 하여 심악이라 불렸으리라. “주역”의 ‘겸(謙) 괘’가 ‘땅 아래 산이 있는 모양(☷+☶)’을 딴 것인데 겸손한 태도를 상징한다. 이 산은 원래 높은 악산(岳山)인데, 겸손하게도 높이를 땅 아래로 낮추어 아담하고 예쁜 산이 되었다고 전해지면 더 좋았을 것이다.
숙종(1724~1776) 때 전설로 이름이 바뀌었다. 궁중에서 기르던 학 두 마리가 도망갔는데, 이 산에서 찾았다고 한다. 이후로 ‘학을 찾은’이라는 뜻으로 '심학(尋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전설은 신화처럼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어 재미있다. 아마도 숙종 때 관직을 고사하고 은둔한 고위직 관리 두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실력이 출중하여 꼭 관직에 임명하고 싶어 찾았는데 이곳에서 찾지 않았을까. 학은 전통적으로 고결한 선비(지식인)를 상징하고, 조선시대 관복의 흉배에 학이 수놓아졌다는 점을 보면 얼추 맞지 싶다. 요즘에도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고위직을 마다하고 조용히 자기 일을 빼어나게 잘하는 자들이 있다. 이런 사람을 찾아 등용시키는 것이 심학 아닐까.
이런 심학산 옆에 출판도시가 자리 잡은 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출판도시를 기획하는데 힘쓴 자들이 심학의 의미를 나처럼 해석한 것은 아닐까? 학이 상징하는 고결한 선비의 덕목이 배움 [학(學)]이고, 배움의 중요 도구가 책(冊)이다. 그 책을 만들어 내는 곳이 출판사이고,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출판사는 여기에 다 모여 있다. 우리가 걷는 길은 이 도시를 살짝 스쳐 지나지만, 그냥 지나가기엔 아까운 곳이다. 학처럼 우아하고 고결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곳을 꼭 방문하여 즐기시길 권한다. 이전에 가본 데 중에서 지지향(라이버러리 스테이), 지혜의 숲(북 카페), 열화당(책 박물관), 미메시스(아트 뮤지엄)를 자신 있게 추천한다. 이곳에 오래 머물면 책의 향기에 젖고 선비의 풍류를 맛본다.
장준하 선생 추모 공원을 지나게 된 일은 뜻깊었다. 그 이름은 이미 많이 들었지만, 그의 평전 한 줄 못 읽었는데, 이렇게 걸으면서 갑자기 만났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이력은 읽을수록 안타까우면서도 고결함이 느껴진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 독립운동가였고, 군부 독재 시절에는 민주 통일 운동가였다. 김삼웅이 쓴 “장준하 평전”에 그를 ‘동양의 선비요 서양의 인텔리겐치아’로 소개한 것은 적절한 것 같다. 학(鶴)의 이미지를 가진 동양의 선비 장준하! 숨겨진 선비를 찾은 곳 심학산! 늦게나마 장준하 선생님을 가까이서 뵙게 된 것은 참 다행이다.
거의 막바지에 이르면 언덕 위 큰 기와집을 볼 수 있다. 차를 타고 자유로를 달리다 보면 높은 언덕 위에 절 같기도, 궁궐 같기도 한 기와집을 볼 수 있는데, 그곳이 고려 역사의 정기를 이어가고자 <고려역사 선양회>가 조성한 '고려 통일대전'이다. 경주에 가면 '신라 문화 선양회'가 있고, 전주에 가면 '후백제 선양회'가 있듯이 고려 정신을 이어가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왠지 씁쓸한 느낌이 든다. 이것이 있어야 할 곳이 개성일 터인데, 어쩔 수 없이 개성을 바라보며 이곳 통일동산 근처 언덕 높이 지어진 것 같고, 그 조차 고구려 정신을 이어받은 고려 정신이 혹 북한의 막무가내 정신으로 오해되지 않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고구려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이곳에도 선비 정신이 스며있다.
그러고 보니 5코스는 ‘선비 정신의 길’이다.
5코스 중간 즈음 파주출판도시에 있는 아트 뮤지엄, <미메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