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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타타타 Aug 07. 2023

그림자를 쉬게 하라

식영정 방문기 1

  전라남도 담양에 식영정(息影亭)이란 정자가 있다. 조선 명종 때 김성원이란 사람이 장인어른 임억령을 위해 지어 주었다는데 그 정자 이름이 눈길을 끈다. 쉴 식(息)에 그림자 영(影)을 합하여 식영, 그림자를 쉬게 한다는 뜻이다. <장자> 「어부」에서 따 온 말이다.

    

공자가 수심에 차 어부에게 물었다. “저는 과실이 없는 것 같은데 네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어째서일까요?” 어부가 말했다. “자기 그림자가 두렵고 발자국이 싫어서 그것들로부터 떨어지려고 달린 자가 있었소. 발을 들어 올리는 횟수가 잦으면 그만큼 발자국이 많아지고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림자는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소. 그래서 아직 느리게 달린다고 생각하여 더욱 빨리 쉬지 않고 달리다가 힘이 빠져 죽고 말았소. 그늘에 있으면 그림자가 없어지고 멈추어 있으면 발자국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을 몰랐던 거요.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오!”(안동림 역주, <장자>)   

 

장자는 내편, 외편, 잡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학계에서는 내편 정도를 장자의 작품으로 처 준다. 외편과 잡편은 후학들의 작품이다. 그래서 더욱 공자의 유학과 대립적으로 기술된 장면이 많다. 여기 그림자 이야기가 실려 있는 「어부」는 잡편에 실려 있다. 그림자 이야기에 공자를 등장시켜 반면교사로 삼은 것은 은근한 우월감 때문이다. “공자처럼 살지 말고 제발 그늘에서 좀 쉬어라.”

   

공자는 죽을 때까지 ‘스스로 성장하기 위한 노력'을 쉬지 않았다 [自强不息]. 거의 말년까지 인(仁)을 실현하는 정치적 책사가 되기 위해 유세했다. 그러나 그의 유세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국 상갓집 개 취급받는 지경에까지 갔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고향으로 되돌아와 글을 쓰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이런 쉬지 못하는 공자의 삶을 비판한 것이 <장자> 「어부」에 실려 있는 그림자 이야기다. “공자처럼 살면 결국 자기를 죽이는 삶이다. 그림자를 떨쳐버리려고 자강불식하는 삶이 결국 자기 삶을 빨리 망치는 일일 뿐이다.”

    

  장자는 왜 그림자를 무서워하고 떨쳐버릴 것으로 묘사했을까? 그 시절에도 그림자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림자는 색깔이 없다. 그저 어둡다. 빛의 반대 이미지다. 이를 알려면 칼 구스타프 융의 도움을 받아야겠다. 융은 이런 그림자 이미지를 그의 분석심리학에 활용하고 있다. 분석 심리학에서는 그림자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림자란 나(자아, Ich, Ego)의 어두운 면, 즉 무의식적인 측면에 있는 나의 분신이다. 자아의식이 강하게 조명되면 될수록 그림자의 어둠은 짙어지게 마련이다. 선한 나를 주장하면 할수록 악한 것이 그 뒤에서 짙게 도사리게 되며 선한 의지를 뚫고 나올 때 나는 느닷없이 악한 충동의 제물이 됨으로써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게 한다."(이부영, <분석 심리학>, 86쪽)  

  

우리는 가끔 ‘도덕적인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추문에 휩싸이는 것을 목격한다. 선한 페르소나 뒤에 감추어진 그림자가 가면을 뚫고 나오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우리는 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 가면의 역할이 지나치게 자연스럽지 못하거나 작위적일 때 그림자는 무의식에 자리 잡는다. 그리고 남들의 시선이 약해질 때 그림자는 스멀스멀 고개를 내민다. 자아의 페르소나를 찢고 느닷없이 나온다. 사람들은 그를 어찌 그럴 수가 있냐며 실망해하고, 그는 충동이었다고 변명한다. 그림자를 쉬게 해야 할 이유이다.

    

<장자>에 나오는 공자는 가상의 인물이다. 그러니 실제 공자는 그림자 같은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 「어부」에 나오는 공자는 도가 사상가들의 공자 인식을 그대로 담고 있는 캐릭터이다. 인이니, 효니, 충이니 하는 인위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천하를 주유하며 유세하고 다니고 있으니 이 얼마나 위대한 페르소나를 수행하고 있는가? 그러나 현실은 더욱 현실적이어서 공자는 제후들로부터 거절당하고 나이는 들어간다. 인, 의, 효, 제, 충, 신, 서의 가치를 더욱 뚜렷이 내세울수록 그 그림자 역시 짙어져 시시각각 고개를 내민다. 이대로 내 인생이 끝나는 건가? 이 얼마나 불안하고 쫓기는 심정일까? 이 때라도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공자는 그림자를 떨쳐내기 위해 더 세게 달린다. “내 안 되는 줄 알지만 그래도 끝까지 해 볼 거야.”  

  

  여기서 장자의 후학들은 공자를 죽인다. 끝까지 달리다가 결국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낸다. 그리고 사망 원인을 진단한다. 그림자를 떨쳐내기 위해서는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 그만인데, 어리석게도 그걸 모르고 더 세게 달리다가 과로사한 것으로. 어리석음으로 인한 과로사.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내버려 두면 될 일이지 왜 억지로 덤벼”  

  

  다시 식영정. 그림자를 쉬게 하라. 그 방법은 그늘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늘에 들어가는 것인가? 일단, 멈추어야 한다. 그러면 붙어 있을지언정 쫓아오지는 않는다. 호흡을 가다듬고, 그림자를 물끄러미 처다 보아야 한다. 알고 보면 그림자는 또 다른 나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페르소나를 수행하느라 억눌렸던, 무시했던 나의 다른 모습들이다. 쫓기느라 나도 힘들었지만 쫓아오느라 그림자는 더 지쳐있다. 그림자를 힘들게 하는 것은 결국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멈추어라. 그러면 그림자는 물론 너도 함께 쉴 수 있으리니.”

  그다음은, 그늘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늘도 사실은 그림자이다. 그러나 장자의 후학들이 말하는 그림자는 도의 그림자이다. 그늘에 들어간다는 것은 도의 그림자 아래서 나뒹굴며 노닐거나, 아무 사심 걱정 없이 거니는 것을 말한다. 소요유(逍遙遊)하는 것이다. 도를 알고 도의 그늘 아래에서 유유자적하는 자유의 삶이다. 그러니 식영정이란 정자는 도의 그늘을 상징하는 셈이다. "공자 후학들이여! '무위자연의 도'라는 그늘에서 좀 쉬다 가시게." 

    

  다행히 요즘 젊은이들은 그림자를 쉬게 할 줄 아는 것 같다. 위 세대 어른들보다 워라밸을 중시하고 자기만의 참된 시간을 가지는 데 적극적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도 많으니 어찌 된 일인가? 양극화된 시대의 모습이다. 그림자를 쉬게 하는 데에도 계급에 따라 다른가? 이건 더 자세히 따져볼 무거운 질문이다. 일단 멈춘다. 내 그림자를 쉬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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