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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Feb 19. 2024

시인 이상은 정말 천재일까?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인 ‘이상’에게 늘 따라붙는 수식어는 ‘천재’다. 한국 문학계에서는 그를 ‘천재시인 이상’이라고 부른다.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등장하는 이상의 시를 읽으면 한국어로 써졌지만 외국어처럼 보이는 기이한 현상을 체험할 수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 단 한곳도 없다. 그것이 한국 문학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무슨 새로운 문학의 바람을 일으켰는지는 솔직히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왜 이런 시를 공부하라고 강요하는지, 저기 교단 위에서 설명하는 선생님은 과연 알고는 가르치는지, 이상의 시에 대한 물음 보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다. 이상은 정말 천재기는 했을까?

 

신적 영감을 지닌 천재 예술가 이미지는 19세 낭만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문학가 유종호는 낭만주의와 천재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대체로 낭만주의 시대에 와서 시인이 힘들이지 않고 황홀경에서 시를 완성하였다는 투의 얘기가 많아진다. 그것은 한편으로 시인이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천재라는 생각을 부추긴다.’ 이러한 낭만주의 시대의 ‘천재 신화’는 예술가에게 신의 계시를 받은 천재라는 아우라를 발산하게 한다. 그 결과, 평범한 사람들은 그러한 예술가들을 동경하고 범접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듯이 생각하곤 한다.


우리는 사실 이러한 ‘천재의 신화’에 많이 놀아난다. 예를 들어 이상의 문학을 인정하지 않으면 마치 교양이 없는 사람인 냥 인식된다. 레오나드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그 알 수없는 묘한 미소 하나로 무수한 해석과 억측을 야기 시킨다. 또 현대 예술가들의 복잡한 예술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작품이 덜 떨어진 게 아니다. 내가 덜떨어진 것이다. 어디 감히 기풍 넘치는 천재적인 예술가의 작품이 덜 떨어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니 될 말씀이다. 비난의 화살은 작품이 아니라 내가 온전히 받아야 하는 것이 7차 교육 과정을 이수한 학생의 도리다.


다시 고등학교 문학 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수업 시간에는 이상의 시 ‘오감도’를 공부하고 있다. 앞에서 이빨 아프도록 말했지만 이 시는 난해하다. 이 시에서는 1~13의 아해가 무섭다고 한다. ‘7인의 아해도 무섭다 그리오’ 라고 말할 때는 이상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이 시를 쓰게 되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궁금증을 참고 우리는 이 시를 이해해야만 한다. 선생님이 우리에게 분명히 존재한다고 확언한 그 천재성을 어떻게든 인정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은 이상의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다.


우리는 이상의 시가 어려운 이유를 작품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그가 천재이기 때문에 라는 말로 쉽게 넘어가려고 한다. 그는 신이 선택한 천재고 우리는 둔재라서 그를 감히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천재의 신화도 동어 반복의 형식주의 산물이다.


예를 들어 ‘이상은 천재다’ → ‘이상은 신의 영감을 받았다’ → ‘이상은 천재다’ 와 같은 도식이다. 이러한 형식주의를 찬찬히 살펴보면 의문점이 떠오른다. 그 ‘신의 영감’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냐? 라는 것이다. 영감이 있었기 때문에 천재가 나타난 것인지 아니면 천재가 있기 때문에 신의 영감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이와 같은 생각은 결국 신의 영감 = 이상의 시 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신의 영감이라는 것은 그 어딘가에 신비로운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이 이상한 시를 썼기 때문에 신의 영감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순환 논리의 오류와 비슷하다.


순환 논리는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영화 ‘범죄도시3’가 성공한 이유의 기사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이미 범죄도시 1,2를 통해 마동석이 연기한 마석도 캐릭터가 확실하게 만들어졌다. 관객들은 이 인물이 나오는 영화는 기대만큼 재미를 줄 것이라는 신뢰를 느끼게 된다’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결국 ‘범죄도시3’가 성공한 이유는 ‘범죄도시3’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범죄도시3’의 성공 이유를 ‘범죄도시3’ 라는 영화 속에서 도출 한 게 과연 얼마나 합당한 성공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아무리 쓰레기 같은 작품을 만들어도 만약 그 작품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그 작품에서 충분히 성공 이유를 뽑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순환논리로 탄생한 천재의 신화에 반기를 든 사건이 미국에서 일어났다. 1996년에 《소셜 텍스트》라는 학술 잡지에 한 논문이 실리면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 논문은 제목은 《경계의 침범: 양자중력의 변형 해석학을 위하여》다. 그 논문이 우수했기 때문에 생긴 파장은 아니었다. 실린 논문이 가짜였기 때문이었다. 가짜 논문을 쓴 사람은 뉴욕 대학교의 물리학과 교수 앨런 소칼이었다. 그가 가짜 논문을 쓴 이유는 많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과학의 개념을 자기 분야에 오용하는 행태를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프랑스 철학자들은 막연하게 아는 과학이론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자연과학에서 나온 개념을 인문학에 도입할 때 최소한의 근거도 밝히지 않으며, 동떨어진 맥락에서 전문용어를 남발하여 어설픈 학식을 과시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학을 잘 알지 못하는 독자에게 겁을 준다고 말한다.


문제는 앨런 소칼이 그 당시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글쓰기 행태를 패러디해 쓴 논문이 제대론 된 심의를 거치지 않고 《소셜 텍스트》의 특별호에 실렸다는 사실이다. 앨런 소칼은 이 같은 사실을 폭로하면서 언론과 학계에 큰 파장을 남겼다. 앨런 소칼은 《지적 사기》라는 책을 쓰며 프랑스 철학자들을 하나씩 거론한다. 그 책에서 그들이 얼마나 빈약한 내용을 난해하고 위압적인 과학 용어로 포장하는지 폭로한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주류 지성인들의 자존심은 산산조각 난다.


앨런 소칼의 발칙한 행동에 대해서 학계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반응했다.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정직한 사유의 부재를 은폐할 목적으로 난해하게 꾸며진 언어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하며 앨런소칼을 옹호했다. 한편으로는 앨런 소칼이 철학자들의 저작 전체적인 맥락은 무시했다는 평도 있었다. 여러 가지 논란에도 불구하고 앨런 소칼이 학계에 던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철학자 본인들도 잘 모르는 과학적 개념을 남용하면서 대중을 속이는 학문은 사기라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 철학자들의 권위에 주눅 든 대중이 다시 그들의 철학을 환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은 확실하다.


학창시절에 배운 것들은 하나같이 복잡하고 어렵다. 선생님은 그것들이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복잡함이 좋은 것이라면 단순한 것은 가치 없는 것일까? 우리는 복잡함의 신화에 주눅 들어서 불필요한 복잡함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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