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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Feb 12. 2024

나는 나를 착취할 권리가 있다

사서 고생한다는 옛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안 해도 될 고생을 자처하고 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한 것도 아니다. 우리 스스로 높은 미션을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갈아 넣는다. 나영석 PD도 자신들의 우둔함을 한탄하며 ‘근데 이걸 누구를 욕할 수도 없는 게, 지들이 그렇게 만든 거야. PD들이’ 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컴퓨터 영상 편집 프로그램으로 10개의 소스만 찍어 편집했다면 PD들은 시간이 남아 돌 것이다. 그 여유 시간에 조금 더 신선한 프로그램을 사색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극단적인 예지만 그리스 로마의 철학자들은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오직 일하지 않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고 했다. 제정 로마 시대에는 성인 남자의 20퍼센트가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일 하지 않는 삶을 꽤 뿌듯하게 여긴 듯하다. 그들은 그 시간에 사색을 하고 여가를 즐겼다.


고대 그리스와 달리, 일의 성격이 바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이백년 전이다. 13세기까지 일은 사람이나 가축이 했다. 증기기관이 개발되고 전기가 발명되면서 노동 방식도 획기적으로 변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 직장은 따분했지만 높은 보수와 안정된 생활을 주었다. 그러면서 노동은 모두 없어지고 일주일 몇 시간 근무하는 감독 업무가 주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러한 예측은 오래가지 않아 헛소리라는 것이 드러났다. 아시아와 남미의 저임금 노동자가 미국에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일자리는 다시 불안을 맞이했다. 미국인들은 미래를 보장 받지 못한 상태에서 불리한 조건의 노동을 감수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현대사회에 와서 노예를 자처하며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오늘날의독특한 변종 질환이다. 과거에 주인은 노예를 벌하며 노동을 시켰다면 이제는 노동자 스스로 자신을 강제한다. 그것은 곧 자기 착취로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 보다 더 효율적이다.


우리는 자기 착취의 늪에 빠져 증가한 업무량의 부담을 느낀다. 그러한 부담 중 하나가 멀티태스킹이다. 현대 사회에서 멀티태스킹 능력이 없다면 살아가기가 힘들 정도다. 사실, 멀티태스킹은 고도로 발달된 정보 사회 속 인간이 갖춰야 할 능력은 아니다. 오히려 멀티태스킹은 수렵 동물들의 주요 능력 중 하나다. 예를 들어 동물들은 먹이를 먹으면서 ‘경쟁자가 먹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먹는 도중에 도리어 잡아먹히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하며, 동시에 새끼들도 감시하고, 또 짝짓기 상대도 시야에서 놓치지 않아

야 한다.


그래서 동물에게 사색은 사치다. 그들은 동시에 할 일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멀티태스킹 능력이 지금도 인간에게 요구되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가 멀티태스킹으로 노동을 하는 이유는 인간이 단순함을 지루해하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뒤에서 자세히 이야기 하겠지만, 인간은 지루함을 결코 참지 못하고 노동의 난이도를 높여서 스스로를 갉아 먹는다. 


독일의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이러한 노동 난이도 설정은 집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낼 때 보다 목표와 보상이 확실해서라고 말했다. ‘집에서 혼자 있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낼 때는 명확한 목표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자기가 일을 제대로 했는지, 산만하지는 않은지, 자신의 실력이 달리는 건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다 보니 따분해지게 마련이고 때로는 불안마저 느낀다.’즉, 사람이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확실한 보상의 구조는 일터에만 있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이러한 일터에서의 자기착취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변모에 있다고 말한다. 규율사회는 ‘-해야 한다’라는 강제적인 부정성이 있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음’ 이라는 긍정성이 대두된다. 이러한 노동자는 성과사회에서 주인에게 복종하는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주인이자 노동자인 성과주체가 된다.


성과사회의 시스템이 빛을 발하는 지점은 생산성이 일정한 지점에 이르렀을 때다. 규율사회에서는 일정한 목표 생산량을 달성하면 더 이상 일을 하지 않는다. 노동자는 ‘의자 100개 생산을 달성해야 한다.’ 주인의 명령이 입력되고 그것을 달성했다면 더 이상 일할 의무가 없다. ‘생산성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금지의 부정성은 그 이상의 생산성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 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그래서 성과사회의 성과주체는 규율사회의 복종적 주체 보다 더 높은 생산성을 보인다.  


곧잘 현대사회의 인간은 타의가 아닌, 스스로가 정한 룰을 지키지 못했을 때 우울해진다. 타인이 정한 룰은 나에게 책임이 없다. 그러나 내 스스로 정한 룰은 나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 더 큰 자괴감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심심함은 인간에게 필요한 순간이다. 심심함을 통해서 정신적 이완을 할 수 있다. 만약 끊임없이 움직이고 분주해야 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창조를 낳지 못한다. 심심함은 새로운 행동에 도전하게 한다. 예를 들어, 심심한데 걸어볼까 라고 생각하거나 걷는 게 심심해지면 뛰어 볼까 라고 생각하고 뛰는 게 심심해지면 자전거를 타 볼까 라고 말이다. 미국의 작가 폴 오스터는 글쓰기라는 작업을 위해서 걸을 필요가 있다고 아래와 같이 말했다.


걷다 보면 단어들이 떠오르고, 머릿속에서 그것들은 쓰면서 단어들의 리듬을 들을 수 있다. 한 발 앞으로, 다른 발을 앞으로 내밀면서 심장이 이중으로 두근두근 뛴다. 두 개의 눈, 두 개의 귀, 두 개의 팔, 두 개의 발. 이것 다음에 저것, 저것 다음에 또 이것. 글쓰기는 육체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몸의 음악이다.


가장 단순한 걷기는 새로움의 씨앗이 된다. 단순함에 집중했을 때 우리는 거기서 새로운 것을 연상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자기착취의 미션이 아니라, 단순함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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