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로케 Feb 15. 2024

왜 나는 사서 고생할까?

일이 너무 많아, 만나야 할 사람이 많아 등 우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외적인 조건들은 어쩌면 허상이다. 대상은 하나이나 그것을 복잡다단하게 만드는 건 우리의 내면이다. 없는 일을 만들고 만나지 않아도 될 사람을 만나고 잡지 않아도 될 미팅을 잡는다. 순전히 내면의 불안과 강박 때문이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늘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스스로의 쓸모를 인정받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쓴다. 우리에게 ‘-하지 않음’이라는 개념이 머리로는 쉽게 이해되나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 않음을 행한다.’ 는 건 어렵다. 담배와 술을 끊기 위해서 어떤 행동이 필요한 건 아니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된다. 그 시간이 오래 지속되면 술과 담배는 어느새 끊어져 있다. 술과 담배를 끊기 위해서 그 어떤 행동도 필요치 않다. ‘하지 않음을 행’ 할 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한다. 어떤 행동을 하거나 힘을 써서 끊는 것도 아니다. 가만히 있으면 끊어지는 데 그것을 어려워한다. ‘하지 않음을 행한다.’ 는 것에는 생각보다 큰 에너지가 소요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가만히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려주는 꽤 충격적인 실험 결과가 있다.


한 과학자가 버지니아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있다. 실험 내용은 피실험자들이 조용한 곳으로 가서 6분 동안 기분 좋은 일을 생각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다. 단 컴퓨터나 TV, 스마트폰 같이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기구는 치워야 한다. 허용되는 건 6분을 알람해줄 타이머 정도다. 이 실험의 조건은 간단하다. 첫 번째는 한 자리에 계속 앉아 있기. 두 번째는 졸지 말고 깨어 있기다.


실험에 참가한 대다수 학생은 딴 생각하지 않고 끝까지 과제에 집중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심지어 이 과제가 전혀 즐겁지 않았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주의가 산만한 학생이라면 이런 과제는 곤욕일 수 있다. 그런데 새로운 추가 실험 결과는 다소 충격이었다.


먼저 실험 참가자에게 전기 충격을 가한다. 대부분 참가자들은 그 전기 충격이 매우 불쾌한 경험이라는 것을 학습했다. 심지어 돈을 내고서라도 그 경험을 안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6분 동안의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실험을 똑같이 했다. 전반적인 실험의 내용은 동일했다. 다만 이번 실험에서 추가된 변수는 이것이다. 원한다면 6분간의 실험 도중 자진해서 전기충격을 받을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 불쾌한 자극을 스스로 받을 학생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학생은 4명 중 1명이, 남학생은 3명 중 2명이 6분 동안 조용히 생각하기 실험에서 적어도 한 번은 스스로 전기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실험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불쾌한 전기충격의 고통을 받는 것이 더 낫다는 결과가 나왔다.


학생들에게 5분의 여유 시간이 있으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조사했다. 89퍼센트가 숙제, 독서, 스마트폰 확인 같은 외적인 활동을 원했다. 생각을 하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11퍼센트 밖에 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은 조용히 생각을 하면서 시간 보내기를 원치 않았고 그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Do nothing is do something 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곧 무언가를 한다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이 말을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즉,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다는 것은 미래의 더 높은 생산력을 위한 쉼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문구를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Do nothing에는 선택이 수반되어 있다. 하지 않음을 선택하다는 것에는 선택이라는 행동이 있다. 그 하지 않음에는 자신의 실존적 선택이라는 Do something이 녹아져 있다.


허먼 멜빌의 단편소설 《필경사 바틀비》에서 바틀비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서류 업무를 정리하는 필경사로 일한다. 어느 날 변호사가 바틀비에게 업무를 요청하자 바틀비는 갑자기 이렇게 대답한다. “안하는 편을 선호하겠어요.(I would prefer not to)" 이 대답에 변호사는 당황해하지만 해고조차 하지 못한다. 변호사는 계속되는 바틀비의 거절 때문에 바틀비만 사무실에 홀로 남기고 본인의 사무실을 이사한다. 변호사는 기존 사무실에 새 주인이 찾아오나 바틀비가 계속 퇴거를 거부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변호사는 바틀비를 자신의 집에 초대해 그 이유를 물어보려고 한다. 그러자 돌아온 바틀비의 대답은 ”안 하는 편을 선호 합니다“이다.


바틀비의 언행은 다소 기이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보통 누군가가 탐탁지 않은 요청을 거절할 때 “난 그걸 원하지 않아” 라고 말하지 “난 그걸 원하지 않고 싶어.” 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건 마치 구글 번역기를 돌린 듯 어색한 표현이다. 바틀비는 자신의 거절 표현에서 ‘해야 함’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음’을 긍정한다. 즉 긍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을 긍정하면서 자신의 실존을 견고히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지 않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하는 것 보다 어렵다. 해야 함을 선택하는 것은 긍정을 긍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지 않음을 선택하는 것은 부정을 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에서 부정을 이룩한다는 것은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실존적 선택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전 04화 나는 나를 착취할 권리가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