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 앞에서의 꿈 Rêverie devant le parc, 1979
공원이 보이는 큰 창가에 앉아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여인,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지금의 계절과 닮은 초록빛의 그림을 그리며 나의 지난 꿈들을 찾아가 본다.
엄마의 꿈은 뭐야?
어느 날인가 딸아이가 물었다.
“엄마는 꿈이 뭐야?”
"음 엄마는.."
바로 답을 못하고 얼버무리던 나는 내가 아이만 할 적 꿈을 생각해 말해주었다.
그 꿈은 간호사.
어릴 적 앨범을 찾아보면 유치원에서 의사 놀이를 하며 간호사를 맡은 내 모습이 꽤나 진진하게 담겨있다.
나의 성향상 누군가를 돌보고 살펴준다는 게 좋아 보였던 것 같다.
아이의 질문으로 떠올려보게 되었지만, 꿈이라는 걸 잊고 산지 참 오래되었던 날들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부터는 나의 모든 생활과 계획들은 대부분은 아이를 향해 있었다.
그 시간들이 사무치게 힘들었고, 그 힘겨운 시간들은 내가 나로서 온전히 서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돌고 돌아 그 시간들은 지금 나에게 삶에 대해, 나에 대해 생각하고 깨달음을 쌓아갈 수 있는 날들이 되어주고 있다.
왜 꿈을 꾸지 않았을까?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나에게 미술이란 재능이 있다는 걸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고 무언가를 만들며 보내는 시간이 좋았고 그 결과들도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나의 재능과 존재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며 어렴풋하게 난 화가가 되어야지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입시를 준비하면서 느낀 화가라는 직업은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난 나의 미래 희망, 꿈, 직업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해 본 적 없이 그냥 하던 대로 하루하루 그림을 그리고 학교를 다니며 보냈던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떠난 프랑스 유학길에 화가가 되겠다는 어렴풋한 꿈은 결국 디자이너로 바뀌었고 제품 디자인을 전공했다.
인턴쉽에서 바라고 바라던 가구 디자인 회사에 떨어지고 난 뒤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왜 떨어졌다며 따지듯 물었던 그때를 생각하면 그때만 해도 꿈이라는 걸 꾸었던 것 같다.
난 오드 뀌뜨르 회사 주얼리 디자이너로 프랑스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프랑스 기업 마케팅 부서에서 일을 했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냥 성인으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나쁘지도 않았다.
20대 생기 가득했던 시절, 직장 동료들과 함께하는 사회생활은 마음에 들었지만, 나는 의미 없이 반복되는 하루하루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나의 첫 꿈
사회생활 속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두어 번의 이직을 한 뒤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꾸역꾸역 다니던 회사.
그때쯤부터 난 온전히 나만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직장생활을 회피하기 위한 꿈이었을지언정 그 꿈을 그려보며 행복했던 것 같다.
작은 공방을 열고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제과를 만들어 판매하는 꿈.
퇴직을 결심하고 퇴직금을 털어 프랑스 제과를 배웠다.
하지만 졸업과 함께 찾아온 첫 아이의 소식, 그렇게 꾸었던 꿈을 접어두어야 했다.
그리고 현재 진행형
아이를 키우며 조금씩 일도 했지만, 나는 나의 자아를 찾기에 늘 갈급하고 목마른 상태였다.
둘째 아이가 4살쯤 되었을 무렵 우연히 학창 시절 화실에서 쓰던 화구 가방을 열어보게 되었다.
아이들의 하얀 스케치북을 꺼내고 말라 붙은 내 물감들에 물을 적셨다.
20년도 넘은 물감들은 꼭 그때처럼 아름다운 색을 피워냈고 그렇게 난 다시 붓을 들었다.
그때의 설렘과 두근거림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나의 꿈 이야기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 하루 속 우리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나의 마음을 살펴줄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나는 나에게 그런 시간을 얼마나 만들어 주고 있을까?
요즘 나는 ‘지금 순간에 집중하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나의 마음에 집중하고, 나의 꿈을 들여다본다.
그 길이 옳고 바른 길이길 바라며, 찬찬히 그리고 꾸준히 걸어가기를 기도하고 소망한다.
그림 속 여인처럼 잠시 시간을 내어 나의 내면과 만나는 시간을 갖자.
그렇게 해주자.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나를 위해, 나의 꿈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