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없습니다만
벌써 35주 차에 접어들었다. 예정일까지 남은 기간은 단 5주, 출산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40cm 넘게 자란 아기가 명치까지 올라와 숨을 조이고 풍선같이 부푼 배 때문에 어떤 자세든 뻐근하지만 신체적 불편함은 차라리 견딜 만하다. 그보다 나를 괴롭게 하는 건 두려움이다. 나는 요즘 두려움에 골몰해 있다.
전국 쫄보 대회가 있다면 나는 금메달 감이다. 귀신, 범죄, 자연재해, 안전사고 등 온갖 영역의 두려움에 취약하다. 놀이동산에 가면 아래에서 혼자 친구들을 기다리고 아무리 인기 영화여도 무서운 장면이 나오면 보지를 못 한다. (대신 나무위키로 줄거리를 정독한다. 그렇게 해리포터와 기생충을 '읽었다'.) 밤길을 혼자 걸을 땐 누가 뒤에 있기만 해도 등에서 땀이 삐질 흐르며 방범용 CCTV를 찾아 괜히 얼굴 도장을 찍는다. 테라스가 달린 원룸에서 자취할 때는 (그 집의 장점이라곤 테라스밖에 없었는데도) 여자 혼자 사는 걸 들킬까 베란다 문을 열지도 않았으며 나이 서른이 된 지금도 새벽에 화장실을 가면 귀신이 나올까 문을 살짝 열어놓는다. 호들갑도 심해서 병원만 가면 방정을 떤다. 치과에서 잇몸에 마취 주사를 놓을 땐 눈물을 줄줄 흘렸고 정형외과에서 발톱을 뽑을 땐 소리를 질렀다. 성형수술이나 피부과 시술도 단지 통증이 무섭단 이유로 시도조차 못 했다. 이런 사람이 애를 낳는다니.
어릴 적부터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 보면 종종 대화 주제가 출산 괴담으로 빠지곤 했다. 얼마나 아플까, 생리통과 비교가 안 된다는데, 우리 엄마는 나를 몇 시간 만에 낳았대, 나 아는 사람은 출산하고 시력이 낮아졌다더라, 누구는 잇몸이 망가졌대, 너네 그 유튜버 애 낳는 거 봤니, 끔찍하더라, 그러게 말이야... 의식의 흐름에 따라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말풍선을 보며 몸서리치면서도 출산이 내 일이라 받아들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이 없이 살거나 낳더라도 한참 뒤일 거라 믿었고 적어도 그런 중요한 결정을 할 때쯤이면 나 같은 쫄보도 부쩍 어른이 되어 두둑한 담력을 갖추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인생은 역시 예측 불허. 해리포터를 보다가 머리 세 개 달린 개가 무섭다고 영화관을 탈출한 어린애는 그대로 몸만 자라 담력도 배포도 없는 임산부가 되었다.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일에 걱정이야 수없이 많지만 출산만 하랴. 떠올리기만 해도 손바닥에 땀이 맺힌다. 못 하겠다고 울면서 도망치면 어떡하지? 환자복을 입고 병원 복도를 뛰어다니면? 아마 남편이 잡으러 올 거야. 의료진은 혀를 끌끌 차겠지. 병원 역사상 전례 없는 진상 산모로 남을 것만 같다.
디스토피아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도망치거나, 식량을 비축하거나, 구원자를 찾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한다. 나는 세 가지를 다 하는 중이다. 출산 후기를 담은 글이나 영상은 애써 회피하면서 순산에 도움이 된다는 요가와 계단 오르기는 성실히 임한다. 그리고 종교를 붙잡는다. 굉장히 이상한 방식으로.
우리 집 방구석에서는 그 어렵다는 종교 대통합이 매일같이 이뤄진다. 내 책상에는 <틱낫한 불교>, <법륜스님의 반야심경 강의>와 가톨릭 성경이 각종 철학서와 함께 늘어놓여 있다. 무교였던 나는 요 근래 끔찍한 혼종이 되어 아침엔 반야심경에 밑줄을 긋고 밤에는 성경을 읽는다.
얼마 전엔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보았다. 출산을 앞두고 혹시 본인이 잘못되면 신랑이 혼자 남게 될까 걱정된다는 어느 임산부의 고민에 스님은 명쾌한 답변을 내려주셨다.
"죽는 자기는 죽으니까 모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고 남편은 장가 한 번 더 가면 되니까 아무 문제가 없어요."
아아, 현명하신 스님. 스탠드업 코미디에 참으로 능하시다. 객석은 한순간에 웃음바다로 변했고 사연자도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이어서 잘 낳을 거니까 안심하라는 말로 영상이 끝났다. 마음을 내려놓고 가볍게 생각하라는 뜻이겠지. 덕분에 조금은 유쾌해졌지만, 안타깝게도 두려움은 조금도 가시질 않았다.
며칠 후 인생 처음으로 목사님과 밥을 먹었다. 교회에 다니는 지인 부부의 식사 자리에 어쩌다 합류한 나를 목사님은 과연 성직자답게 따스히 반겨주셨다. 갈비탕을 사주고 자꾸만 깍두기를 갖다주는데다 집까지 데려다주시는 그분의 친절에 감복한 나머지 나는 차 안에서 뜬금없이 두려움을 고백했다. 지혜를 나눠달라는 간절한 부탁에 목사님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이라는 성경 구절을 아주 진지하고 상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어떤 의미인지 이해도 되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싶었으나 내 안에 박혀있는 무신론은 어찌나 뿌리 깊은지, 신이 함께 한다는 말씀이 도통 와닿지 않았다. 하기야 신앙이라는 게 쉽게 생길 리 있나. 목사님은 정말 좋은 분이셨지만, 안타깝게도 두려움은 조금도 가시질 않았다.
오히려 그 구절은 나로 하여금 현실을 냉정히 바라보게 만들었다. 물론 누군가 곁을 지켜준다면, 초월적인 존재가 아닐지언정 훨씬 위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출산이란 온전히 혼자 하는 일 아닌가. 현대 의학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의료진과 남편이 옆에서 도와주더라도 순간의 진통을 감내하는 건 결국 산모 본인이다. 산고의 부담은 그 누구와도 나눠질 수 없다. 위험을 감수하고 분만에 뛰어들어 지난한 고통을 견디고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 모두 내 몫이다. 목사님 말씀과 반대로 나는 두려움 앞에서 철저히 홀로 남게 될 것이다. 문득 몇 년 전이 떠올랐다.
임용고사 2차 시험 때였다. 저녁에 먹은 빵이 문제였는지 극도의 긴장감 때문인지 밤새 토하느라 한숨도 못 잔 채 아침을 맞이했다. 필기시험으로 구성된 1차 시험과 달리 2차는 면접과 수업 실연 위주라 한 사람씩 시험장에 들어가는데 내 순서는 맨 뒤 쪽이라 대기실에서 한나절은 기다려야 했다. 텅 빈 책상에서 자다가 깼다가, 멍 때리기를 한참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주변은 서른 명에서 두 명으로 줄었고 마침내 내 차례가 되어 옆에 있는 준비실로 들어갔다. 5분 간 답변을 구상하고 복도로 나와 면접관 세 명이 앉아있는 교실로 들어가기 전 짧은 찰나에, 그 순간 내가 완전히 혼자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노크를 두 번 하고 문을 열면 새로운 공간이 열린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오롯이 내 선택과 능력에 달려 있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다리가 벌벌 떨리지만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다. 참여자도 목격자도 나 자신뿐인, 잘 되면 내 덕 못 되면 내 탓인 이 시험에서 나는 반드시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어떻게든 혼자 이겨내야 한다.
그건 마치 피하고 싶었던 가장 어색한 상대와 엘리베이터에 둘이 남은 기분이었다. 분명 여러 명이 타고 있었는데 어느새 둘만 남겨진, 적막한 공기에 숨소리까지 신경 쓰이는, 괜히 헛기침을 내뱉고 천장을 올려다보지만 도착하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민망한 상황. 나에게 나 자신이란 별로 친하지도 그렇다고 믿음직스럽지도 않은 낯선 존재인데 돌연 그와 정면으로 마주하려니 멋쩍고 당황스러웠다. 되도록 피하고 싶고 기왕이면 다른 사람과 함께이길 바라지만 어쩔 도리가 있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손을 붙잡고 잘해보는 수밖에. 사흘에 걸친 시험 내내 비슷한 느낌을 받았지만 드르륵 문이 열리고 면접관 앞에 서면 이내 어색함을 떨쳐내고 그간 준비했던 걸 차분히 보여줬다.
두려움을 통과할 땐 누구나 긴밀해진다. 인간은 공포 앞에서 끈끈해지는 성질이 있다. 아무리 건조한 사람이더라도 두려움에 잠식되는 순간 가족에게, 동료에게, 신에게 찰싹 들러붙는다. 그때의 나는 나를 비집고 새어 나오는 끈끈이를 던질 대상이 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외면하고 때로는 무시했던 나와 독대하며 우리는 전보다 가까워졌다.
출산 당일 주변은 굉장히 소란스럽고 바쁠 것이다. 남편이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의료진은 수시로 들어오며, 가족들은 내 소식을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거대한 고통 앞에 혼자 남아서 삶에서 가장 어려운 숙제를 해내야 한다. 안타깝게도 합심할 상대는 나 자신뿐이다. 쫄보 겁쟁이인 데다 할 줄 아는 건 호들갑밖에 없는 나. 임용고사 이후로 마주친 적도 없는 나.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너 내가 시원찮지? 그래도 어쩌냐, 나밖에 없는데. 라며 말을 건네는 나. 우리는 또다시 둘만 남는다. 어마무시한 사건을 겪으며 이번엔 얼마나 긴밀해질까.
출산의 공포를 이겨내는 법 따위는 도저히 못 찾겠다. 무엇을 상상하든 끔찍하고 어떻게 대비해도 불안하다. 다만 기대되는 점이 있다면 출산을 통해 아기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살면서 한 번은 해볼 만하지 않을까. 여전히 두려움은 가시질 않지만, 알 수 없는 객기가 찔끔 올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