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0. 임산부의 목소리
임산부의 목소리는 어디로 갔을까? 요즘 아이들은 이렇고, 엄마들은 저렇고, 우리 때는 어땠고, 그러니 애는 어떻게 키워야 한다는 말. 아이 키우는 게 힘들긴 해도 보람차고 더없는 행복이니, 한 명은 꼭 낳아야 한다는 말. 막막한 세상에 굳이 아이를 낳고싶지 않으며, 다른데서도 충분히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말까지. 임신· 출산·육아를 둘러싸고 여러 사람이 말을 얹지만 그 가운데 임산부의 목소리를 들은 기억은 희미하다. 해봐야 입덧이 고생이라거나 몸이 무거워진다는 신체적 변화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임산부의 감정과 생각, 경험은 어디로 간 걸까.
임신 초기 내 삶엔 격렬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이제 곧 배가 나오고 몸이 변할 것이며, 출산의 고통을 맞닥뜨린 후, 한 생명을 올바른 인간으로 길러내야 하는데, 어느 것 하나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안 그래도 경황이 없는 와중에 입덧까지 시작돼 몸도 마음도 엉망진창이었다. 주변에서 축하를 건넬 때면 실은 아이를 원한 적이 없었으며 그래서 굉장히 혼란스럽다고 솔직히 고백했고 그럼 주로 돌아오는 말이 “피임은 했어?"였다. 공감받고 싶은 마음에 어떻게 된 건지 구구절절 설명했으나 어찌 됐든 내가 '철저한' 피임을 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고 남들에게 그건 곧 임신을 '선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묘하게 바뀌는 공기 속에서 어쩐지 비행 청소년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얼마 후 나는 입을 다물고 대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온라인에 에세이를 연재하자 그 자체만으로 답답함이 해소됐음은 물론 반가운 동지를 만날 수 있어 좋았다. 그러다 한 번은 다짜고짜 "왜 피임은 안 하셨나요??"라는 댓글이 달렸다. 할 말이 넘쳤지만 덤덤히 창을 닫았다.
하얀을 만난 건 어느 모임에서였다. 그녀는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월요일 아침마다 한 주를 회고하는 독특한 모임의 호스트였다. 임신 주수가 똑같다는 신박한 공통점 외에도 하얀과 나를 강력히 이어주는 끈이 있었는데, 하얀 또한 나처럼 임신과 동시에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당황했고, 두려웠으며,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모든 걸 혼자 감내하고 남편에게조차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지 못했다. 합의하에 내린 결정, 내가 '선택한' 일에 힘들다고 하는 게 모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임산부는 감격스런 마음으로 소중한 아기를 감사하게 맞이할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거스르는 것도 어려웠다. 그 통념에서 벗어난 자신을 보면 주변 사람들이 상처받을까 봐, 또 스스로도 본인의 감정이 낯설어서 끊임없이 혼자 되물었다. 기뻐야 하는데 왜 기쁘지 않니? 아기를 사랑해야 하는데 왜 사랑하지 않니? 남몰래 침대에 누워 고민하고, 울고, 귀여운 아기 영상을 보며 마음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 애썼다.
그동안 피임은 여성 인권 신장의 조건이자 결과로써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수많은 여성의 투쟁을 거쳐 피임법이 하나씩 상용화되었고 임신과 육아는 비로소 선택의 영역으로 옮겨갔다. 지금도 어떤 문화권의 여성들은 원치 않는 재생산을 반복하며 삶의 대부분을 보내는데, 이를 보면 임신을 선택한다는 게 여성 해방과 자유라는 맥락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지 새삼 와닿는다. 그러나 바로 그 선택이라는 본질 때문에 피임은 때때로 여성을 탓하는 무기가 된다. '너희가 피임 안 했잖아. 임출육(임신, 출산, 육아)을 선택한 건 너 자신이잖아. 그러니까 불평하지 마.'라는 논리의 든든한 밑받침으로 쓰이는 것이다.
과연 임신이 정말 선택의 문제일까? 애초에 100% 피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누군가는 부작용 때문에 특정 피임법을 사용하지 못하기도 한다. 아기가 생기는 과정은 신체와 감정에 너무나 깊이 얽혀있어 이성과 의지만으로는 통제하기 어렵다. 어떤 이는 준비도 없이 임신을 맞이하는 한편 간절히 원하는 누군가에겐 아기가 찾아오지 않으니 임신을 단순히 선택의 산물로만 단정짓기엔 무리가 있다. 설령 온전히 원해서 계획하에 임신했더라도 당사자는 무섭고 불안할 수 있다. 아기가 낯설고, 태담도 어색하고, 출산만 떠올리면 냅다 도망가고 싶을 수도 있다. 이제 막 엄마가 된 여성에게는 가슴 벅찬 행복만큼이나 다양한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그러나 선택했으니 책임져야 한다는 무적의 논리 앞에선 누구도 솔직한 목소리를 내기 어려워진다. 여기에 '엄마는 아기를 사랑하고, 아기 낳은 걸 후회해선 안된다'라는 모성 프레임까지 더해져 임산부는 자신의 상황을 어디에 털어놓기는커녕 스스로를 의심하고 책망하게 된다. 임신 자체만으로도 힘든데 내 마음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이중으로 고통을 겪는 셈이다.
아기 가진 게 기쁘지 않으면 나쁜 엄마일까? 임신을 후회하면 무책임한 엄마일까? 온갖 갈등과 고민의 홍수 속에서 어떤 것이 모성을 견고히 다져줄지는 당사자를 포함해 아무도 모른다. 엄마의 고초가 아이에게 유익한 양분으로 변모하기도 하며 고된 엄마의 모습을 보고 아이는 인생의 입체적인 면을 배울 수도 있다. 그러니 무엇 하나도 모성과 대척점에 있다고 딱 잘라 구분할 수 없다.
누구나 기뻐할 자유만큼 기뻐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세상 모든 엄마는 힘들 때 힘들다고, 괴로울 땐 괴롭다고 털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꽁꽁 싸맨 상처는 결국 곪아서 흉터를 남기니까. 돌봄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기에, 아주 멀리 가는 여정이기에 기쁨도 슬픔도 나누지 않으면 지쳐 쓰러지고만다. 하얀을 만나고 나는 비슷한 고민을 하는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고,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이야기가 모이면 힘이 생긴다는 것을, 홀로 있을 때 ‘내가 예민한가? 나만 이상한가?’ 싶어 의심하고 묻어뒀던 작은 조각도 타인의 것과 맞물리는 순간 의외의 모양을 완성한다는 것을 직접 체감했다.
대담을 공개하기에 앞서 혹시라도 마주할 싸늘한 시선과 차가운 비난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전부를 내보이기로 한 이유는 우리 같은 여성에게 종이비행기를 날리기 위해서였다. 임신했지만 마냥 좋지는 않은 임산부, 육아로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면서 가끔씩 아이 없던 삶을 그리워하는 양육자에게 종이비행기를 꾹꾹 접어 보내고 싶었다. 우리 여기 있다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임신도 출산도 우리가 선택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힘든 건 사실이라고. 괜히 죄책감 느끼면서 홀로 삭이지 말고 진실하게 털어놓고 뭐든 함께 나누자고 제안하고 싶었다.
만약 당신 곁에 종이비행기가 무사히 도착했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목적은 다 이룬 셈이다.
임산부의 목소리는 훨씬 더 많아져야 한다.
나는 당신의 목소리가 듣고싶다.
아래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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