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 이런 기분이어도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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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글과 이어집니다.
민지(이하 민): 저는 공포 영화 한 장면의 주인공이 된 기분? 너무 무서웠어요, 진짜.
하얀(이하 하): 그때 직장을 다니고 계셨죠?
민: 네. 올해 처음으로 저학년 담임을 맡았는데 어린아이를 대하는 게 정말 어려운 거예요. 나는 어린이와 안 맞는 사람이구나, 학교에서도 이러는데 집에서 온종일 애를 보는 건 도저히 못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와중에 임신했으니 최악의 경우만 그려졌고요. 계획에도 없었고, 아무 준비도 안 됐으니 굉장히 우울했죠. 하얀 님은 어떠셨어요?
하: 저는 초기 내내 기뻐해야만 한다는 마음과 본능적으로 불안한 마음이 싸웠던 것 같아요. 지금이야 태동도 있고 아기의 존재가 느껴지지만 그땐 실감이 안 났거든요. 근데 당장 누굴 낳아서 키워야 한다니 너무 두려운 거예요, 감당하지 못할 것 같고. 저는 제 인생이 제일 중요하고, 저 스스로가 누군가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는 걸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막상 임신하고나니 후회됐죠. 돌이킬 수 없는 중요한 결정을 너무 쉽게 한 것 같아서요. 남들은 초음파 사진 보면서 젤리곰 됐다, 너무 귀엽다 하잖아요. 주변에 알리고, 축하받고, 아기용품 보러 다니고. 근데 저는 내내 마음이 복잡했어요.
민: 저랑 똑같네요, 젤리곰. 저도 아무 감흥이 없었거든요. 나만 이상한가 싶었어요.
하: 그래도 새 생명이 내 안에 있는데, 기뻐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해 자괴감이 들었어요. 내가 너무 쉽게 가졌나보다, 그래서 소중함도 모르나보다 하면서 자책했죠. 근데 내 인생의 앞날을 생각할 때면 아이라는 존재가 너무…
민: 밉고.
하: 맞아요. 싫은 게 아니라 밉고. 그 말이 정확해요.
하: 근데 제가 선택한 거잖아요. 누굴 탓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말이죠. 그리고 엄마라는 존재가 되는 순간 주변의 잣대가 되게 가혹해지잖아요. '어떻게 임산부가 저럴 수 있느냐, 누가 낳으라 한 것도 아닌데'라고 할까봐… 이런 불안감을 갖는 것에 대해 어디 얘기하기가 조심스러웠어요. 남편한테도 솔직히 말하기 어렵더라고요.
민: 남편분한테는 왜요?
하: 남편에게도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요. 아내가 나랑 같이 자식을 낳기로 했는데, 갑자기 혼자 당혹스러워 한다는 게. 제가 한번 블로그에 농담식으로 '남편은 자기 배 안 아프고 자식 가질 수 있어서 좋겠다, 난 너무 힘들고 아픈데'라고 썼는데 남편이 상처 받은 거예요. 물론 제가 남편보다 더 힘들다는 것에는 둘 다 동의하지만, 남편도 나름의 고충이 있는데 제가 그걸 싹 무시하고 ‘네가 힘든 게 뭐 있어?’ 식으로 얘길 했으니 말예요. 그 이후론 각자의 상황에 맞는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하니 누군가에게 털어놓기가 어려워지더라고요.
민: 그럼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도…
하: 솔직히는 말 못했어요.
민: 헉! 그럼 어떻게 견디셨어요?
하: 임신이 항상 마냥 싫다기보단, 어쩔 땐 신기하고 기쁘기도 하니까, 지금은 내적 갈등을 겪는 시기인가 보다 했어요. 그때 아기 영상 많이 찾아봤거든요. 내 아기도 이렇게 귀엽겠지 하면서 아기가 주는 기쁨에 대해 학습해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너무 부정적인 생각만 하지말자고 하면서요.
민: 감정도 학습해야 한다니. 정말 어렵네요.
하: 아기 볼 생각에 신나고 기쁜 주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도 힘들 때가 있었어요. 다들 제 속도 모르고 기뻐하면서 "너무 좋다", "나 이제 아기 볼 수 있는 거야?" 하니까. 나한테는 고된 일이 누군가에겐 마냥 기다려지는 행복이라는 게 야속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더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민: 그러네요.
하: 근데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란다는 생각도 했어요. 축하할 일이니까 축하해주시는 거잖아요. 괜히 내가 꼬아서 듣는 것 같고, 그래서 죄책감 들고, 말은 못 하고, 집에 와서 혼자 울고…
민: 홀로 삭이셨네요. 저는 다 발산했거든요. 남편, 친구, 상담 선생님한테 얘기하면서요.
하: 적절하게 얘기하는 방법을 몰랐어요. 엄마인 내가 이렇다는 게 모두에게 상처가 될 것 같아서. 사람들이 기뻐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감사한 일이죠. 근데 참…. 초기에는 왜 그랬는지, 이상한 데서 많이 터졌어요. 예를 들어 누가 제 안부를 묻기 전에 “아기는 잘 자라고 있지?” 물어보면 섭섭해 했어요. 그렇지만 그걸 말은 못 하겠으니까 다른 데서 심술 부리게 되는 거예요. 이게 좋지 않은 방식인 건 알았어요. 근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민: 자기 검열을 계속 하셨네요.
하: 왜 그럴까요?
민: 착해서 그래요(웃음). 제가 보기엔 하얀님 생각과 감정이 다 합리적이거든요? 충분히 서운하고 속상할 수 있어요. 근데 계속 '이래도 되나?', '내 고민을 털어놓으면 누군가 상처받을 거야' 하면서 혼자 마음고생하신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하: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긴 해요. 그래서 아기의 감정 상태에 영향이 갈까 걱정도 됐어요.
민: 근데 저도 자책 많이 했어요. 특히 피임에 관해서요. 저는 여지껏 책임감 없이 애 키우는 사람들을 보면 '누가 애 낳으라고 시켰어? 본인이 좋아서 낳아놓고 왜 그래?'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이나, 자식에게 부채감을 심어주는 드라마마에도 거부감을 느꼈어요. 미디어에선 항상 부모님은 헌신하는 존재고, 자식은 불효자로 그려지는데 사실 다 부모가 선택한 일이잖아요.
하: 저도 그랬어요.
민: 그럴 거면 결혼하지 말았어야지, 애를 갖지 말았어야지, 근데 낳았잖아? 그럼 제대로 키워. 이렇게 생각했던 거예요. 원래도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분명한 데다 전공과 직업이 교육 쪽이다 보니 아이는 이렇게 낳아서, 이렇게 키워서, 딱딱딱 해야 한다는 저만의 잣대가 있었어요. 아주 오만했죠. 결국엔 그 화살이 저 자신을 향하더라고요. 계속 저를 탓했어요. 피임을 제대로 안 한 것도 내 잘못, 임신도 내 잘못. '죄지었잖아, 입덧도 우울도 다 네 죗값이야.' 이런 말을 스스로에게 아무렇지 않게 했어요.
그러다 갈수록 억울한 거예요. '그래 맞아, 근데 이렇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큰 죄를 지은 거야? 내가 그렇게 잘못했어?' 하면서 많이 울고.. 그제야 그동안 제가 함부로 평가했던 타인들이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애를 갖는 것도 낳는 것도 이렇게 사람 마음대로 안 되는데 부모를, 특히 아이 낳은 여성을 누가 함부로 비난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이 매번 이성적일 수 있겠어요. 이건 이성으로만 결정할 일도 아니고. 그리고 제가 하도 자책하니까 주변에서 다양한 사례를 말해주는데 수술하고 임신이 된 경우도 있고, 약 먹는데 생기기도 하고, 피임이라는 게 100%는 없더라고요. 그때 알았어요, 인간이 모든 걸 다 선택하고 통제할 수 없구나….
하: 임신은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저도 임신 전엔 임신이 이런 건줄 몰랐단 말이죠. 그러니까 임산부한테 자기가 선택했으면서, 엄마인데 어떻게 그래 이러쿵저러쿵 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죠. 근데 사실 저도 '누가 임신하래?' 이런 논리 앞에 서면 할 말이 없어요. 그래서 답을 못 찾았어요. 내가 힘들다고 하는 게 괜찮은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민: 저도 고민했는데요, 나 같은 임산부 한 명을 위해서라도 힘들다고 말해야 해요. 예를 들어 지금 우리의 대화도 열 명 중 아홉 명은 '본인이 임신해 놓고 왜 이렇게 징징거려'라고 생각하겠죠. 근데 한 명은 공감할 거예요. 제가 그 한 명이었거든요. 세상에 아홉 명을 위한 자료는 많은데 한 명을 위한 건 없더라고요. 그러니까 이런 걸 얘기하고 발행할 가치는 충분히 있어요.
하: 설령 원해서 임신했더라도 많은 분이 두려움, 섭섭함, 억울함, 화, 불안 같은 복잡한 감정을 느낄 거예요. 사실 저도 원했냐, 원치 않았냐로 따지면 원한 거잖아요. 아기를 갖기로 합의한 후에 임신한 거니까. 근데도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두려움과 억울함이 갑자기 확 들이닥쳤거든요.
민: 사람이 어떻게 후회하지 않을 선택만 해요. 애초에 다 예측할 수가 없는데. 임신은 너희의 선택이니까 기뻐해, 책임져, 라고 하기엔 너무 무게가 커요. 직장도 다니다가 바꾸는 마당에, 당연히 여러 감정을 느낄 수 있죠.
하: 몇 년을 공부해서 얻은 직업도 후회할 때가 많잖아요. 알아보고 고심하고 선배도 만나고 실습도 거쳐서 선택한 직업임에도 막상 해보니까 이게 나에겐 아닌가 보다 깨닫는 경우도 많은데, 임신이라는 큰 변화를 어떻게 정확하게 예측하고 마냥 기쁠 수만 있겠어요. 이렇게 생각하면 임신 이후 방황도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나요? 아이를 가진 엄마는 행복해야 한다는 환상 때문에 실제 여성들이 느끼는 감정이 유야무야 지워지는 것 아닐까요? "처음이라 그래", "호르몬 때문이야", "막상 낳으면 엄청 예뻐", "아기 보면 다 까먹어" 이런 말로 무마되는 거죠.
민: 한편으론 이런 파도가 모성애를 만드는 것 같아요. 저는 임신하고 신체적, 정신적 고통과 역경을 거치면서 오히려 단단해지고 있거든요. 흙에 열을 가해야 단단해지는 것처럼요.
하: 저도 비슷해요. 처음엔 10개월이라는 임신 기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어요. 거의 1년인데 이게 보통 큰 시험 하나를 준비하는 시간이잖아요. 여러가지 사건과 감정을 겪으면서 점차 아이를 받아들이고, 주변 사람들 말도 이해하고, 내가 뭘 원했는지도 깨닫게 되더라고요. 열 달이 아기가 몸 속에서 자라는 데 필요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엄마에게도 스스로를 위한 준비 시간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나에게도 필요한 시간인 거예요.
민: 얼마 전 법륜 스님이 쓰신 <엄마 수업>이란 책을 읽다가 육아 용품 준비보다 부모 마음 수행이 먼저라는 말을 보고 진짜 공감했어요. 정말 마음의 문제예요. 제가 임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결정적인 이유도 두려움이었거든요. 물론 경제적인, 일적인 준비도 안 되어있지만 그보단 출산에 대한 공포가 가장 컸어요. 내가 아이를 키울 그릇이 아니라는 것도 굉장히 무서웠고요.
그런데 요즘엔 과연 두렵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어요. 내가 만약 3-4년 신혼을 보내고 피임도 잘 하다가 임신 준비 제대로 시작해서 엽산도 먹고 계획대로 탁 임신을 했다면 좀 달랐을까? 덜 무서웠을까? 아니죠. 그럼 산부인과 의사라면? 성직자라면? 사실 누구도 부모가 될 준비를 완벽하게 할 수는 없는 거예요.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요. 준비가 돼서 애를 낳는 게 아니라 애를 품고 낳는 과정에서 어찌 저찌 되는 거죠.
하: 칼로 베면서 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 것 같아요, 임신을 하고 엄마가 된다는 일이란.
원래는 매주 에세이를 쓰다가 최근 좋은 분을 만나 대담을 나눴습니다. 대담은 에세이랑 또 다른 맛이 있네요! 다음 에피소드는 다음주,, 아니 다다음주에 올라올 예정입니다. 애 낳기 직전까지 계속 글을 쓰는 게 목표예요. 힘 닿는 데까지 써보겠습니다 에세이든 대담이든요,, 허허 많은 관심 부탁드리고여
독자 여러분 항상 감사합니다. 따뜻한 연말 되시구요 다들 건강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