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 25주 -나의 모성애는 고통에서 시작됐다

by 화랑

임신 초기 나에게선 모성애의 'ㅁ'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학교에서 처음으로 1학년 담임을 맡아 어수선한 데다 고학년과 차원이 다른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에 기진맥진한 시기였다. 자신감이 바닥을 쳐 어린아이라면 더 이상 가르치는 건 물론 낳거나 키울 엄두도 나지 않던 와중에 뜻밖의 소식이 찾아왔다. 기쁨보단 두려움, 설렘보단 걱정이 앞섰고 그저 어딘가로 멀찌감치 도망치고 싶었다.


임산부 커뮤니티에선 비슷한 주수의 사람들이 초음파 사진을 자랑하고 있었다. 새까맣고 흐릿한 형체를 보고 ‘귀엽죠? 드디어 젤리곰이 됐어요!'라며 감탄하는 그들과 달리 난 아무 감흥이 없었다. 내 눈에 아기집은 블랙홀, 아기는 강낭콩 같았다. 신기하긴 해도 귀엽진 않았다. 참치 통조림이 아기에게 해로운지, 어떤 태아보험에 가입해야 하는지 궁금해하는 글 사이에서 나는 ‘입덧 수액 효과’, ‘임산부 편한 속옷’ 등 철저히 나를 위한 정보만 찾아 읽었다. 태교와 육아엔 관심도 없고 배에다 이름을 부르거나 말을 거는 게 되려 낯간지러웠다. 뱃속 아기를 생각하라거나 홀몸이 아니니 조심하라는 말을 들으면 괜한 반발심까지 들었다.


그때 나는 부정적 감정의 총체였다. 인사이드 아웃으로 치면 모든 캐릭터가 날뛰는데 기쁨이만 이민 간 상태였다. 특히 (영화엔 없지만) 자책이와 반성이가 주로 활약했다. 머릿속에서의 나는 죄를 지었고 그래서 벌 받고 있으며 진작 자궁 안에 루프를 심어버렸어야 했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입덧으로 고역에 시달릴 때면 안 그래도 불청객 같은 아기가 더 미웠다. 가능하면 일단 빨리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고, 더 가능하면 처음으로 되돌리고 싶어서, 그래서 솔직히… 아기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다. 속 쓰림과 구역질로 밤을 새운 어느 새벽, 남편을 깨워 우리 3년 뒤에 다시 갖자고, 정 아이를 원하면 그때 낳아주겠다고 호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콘크리트 같던 마음에 균열이 일기 시작한 건 입덧한 지 보름 정도 흘렀을 때였다. 나날이 심해지는 증상에 그새 살이 쪽 빠지고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지만 뭐랄까, 물러서고 싶진 않아 졌다. 영겁 같은 보름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 보름을 버틴 게 마치 큰 산 하나를 넘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면 끝까지 해내서 뭐라도 얻고 싶었다. 돌아가기엔 아까웠다. 그렇게 보름이 한 달,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두 달 반 째에 입덧이 멎었다. 환도 통증이라는 새로운 증상이 생겼지만 아무렴 입덧보단 나았다. 게임이라 치면 첫 번째 퀘스트는 깬 셈이었고, 임무를 달성했으니 보상이 필요했다. 나는 그 보상이 아이이길 바랐다. 건강한 아이를 낳아 나의 고통과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받고 싶었다.


어느덧 강낭콩이었던 아기는 머리와 팔다리가 또렷해져 제법 인간의 형태가 되었고 그제야 초음파 사진을 몇 번이고 들여다봤다. 화면 속 아기 몸 한가운데 위치한 검은색 점에 마우스를 갖다 대면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 광경이 무척 단순하고 기계적이라 마냥 감동적이기보단 어쩐지 낯설고 약간은 오싹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저 쪼끄만 게 살겠다고 열심히 숨을 쉰다니 마음 한 구석이 묘하게 일렁였다. 너도 힘들겠네, 난 진짜 죽을 맛이야. 우리 꼭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자. 아직도 태담이 어려워서 대신 마음속으로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오른쪽 아랫배가 아팠다. 처음 겪는 신박한 통증이었다. 사타구니 쪽이 딱딱하게 뭉치면서 콕콕 찌르는, 생리통이나 장염과는 아예 다른 느낌. 의학적 지식은 없어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여기가 바로 자궁이로구나. 아기가 있다기엔 너무 아래쪽이라 긴가민가했지만 어쨌든 임신 때문인 게 분명했다. 늦은 밤이라 병원 문은 다 닫았는데 통증이 계속 돼서 잠이 안 왔다.


처음으로 인터넷에 '유산'을 검색했다. 유산의 주요 증상은 자궁 출혈과 하복부 통증인데, 출혈은 없어도 아랫배가 뻣뻣하면서 찌르는 듯한 아픔이 강하게 지속됐다. 나와 비슷한 경우를 찾으려 숨 가쁘게 스크롤을 내리다 어느 순간부터 유산 후기만 읽게 됐다. 먹먹한 사연들에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너무 무심했나, 아기를 거부해서 하늘이 벌을 주나, 입덧이 벌인 줄 알았더니.. 소량의 출혈이 있었는데 내가 못 본 거면 어떡하지, 만약 아기가 잘못되면… 안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말은 취소였다. 입덧까지 끝난 마당에 내심 정도 들어서 이젠 정말 낳고 싶었다. 출산도 육아도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도전해보고 싶었다.


불안이 극에 달해 분주히 응급실을 알아보는데 어딜 가도 지금 당장 산부인과 진료를 받기는 쉽지 않았다. 옆에서 남편이 괜찮을 거라며, 일단 좀 자고 아침까지 지켜보자고 다독였다. 남편 말이 맞았다. 시간은 벌써 새벽 세 시를 지나 차라리 다음날 아침에 일반 병원에 가는 게 나았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겨우 눈을 붙였는데 그 사이 끔찍한 악몽을 꿨다. 몹시 선명하고 무서운 꿈이었다. 악 소리를 지르며 깨자 베갯잇이 땀과 눈물로 축축이 젖어있었다.


아침이 되자 통증이 줄었고 기분도 나아졌다. 막상 병원에 가려니 잠을 못 자 그런지 그냥 다 귀찮았다. 별 거 아닌 일로 유난 떠는 것 같아 망설여지기도 했다. 어차피 진료는 5분도 안 돼서 끝날 텐데. 늘 그렇듯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금방 돌려보내지 않을까. 그래도 집을 나섰다. 마음 한 구석이 계속 찝찝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괜찮아도 밤에 또 어떨지 몰랐다. 또 악몽을 꾸긴 싫었다. 괜찮다는 한 마디가 전부더라도, 오늘은 그 말을 꼭 듣고 싶었다.


하필 토요일이라 산부인과 로비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정말이지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저출산을 둘러싼 언론의 호들갑을 의심하곤 한다.. 강남 학군지에서 40명을 데리고 수업할 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대전도 분만병원이 늘 붐비는 데다 산후조리원 예약도 치열하다. 2030 세대가 애 안 낳는 게 문제라는데 정말 그럴까..?) 그중 아기를 데려온 젊은 부부에게 눈이 갔다. 한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아기가 무척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뽀얀 피부에 토실한 팔다리를 뽐내며 이따금 내 쪽을 쳐다봤고 그때마다 나는 격하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기나긴 대기 시간 동안 물끄러미 아기를 쳐다보고 있으니 문득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간 나에게 임신은, 입덧을 비롯한 각종 불편함을 동반하는, 전에 없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어느 틈에 불쑥 찾아와 내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무거운 책임과 막연한 공포를 내맡기는 불청객이었다. 말하자면 사고 혹은 재해였다.


그런데 앞에 보이는 저 아기는 천사 같았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고 순수했다. 놀랍게도 그와 비슷한 존재가 내 안에 있었다. 나와 남편을 닮은 이 아기는 곧 세상에 나타나 우리와 오래도록 함께할 예정이었다. 몇 달만 지나면 나는 그와 온종일 눈 맞출 수 있었다. 손 잡을 수 있었다. 만지고, 쓰다듬고, 냄새 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임신이란 대단한 축복이고 선물이었다.


1시간쯤 흘렀을까. 드디어 내 차례가 됐다. 역시나 의사 선생님은 별 문제없을 거라며 쿨하게 반응하셨다. 곧이어 초음파로 본 아기는 매우 건강했다. 사타구니 근처의 부위는 자궁이 맞았고 어젯밤 아팠던 정확한 위치에 아기가 있었다. 아기집이 커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통증이었다. 선생님은 활발하게 팔다리를 움직이는 아기에게 "엄마는 아픈데 이놈의 새끼는 신났네!"라고 하시곤 심장 박동을 확인하셨다. 꿈틀거리는 아기 모습도, 팔딱팔딱 뛰는 심장 소리도 새삼 경이로웠다. 괜찮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 끝났다고 다리를 툭툭 치는 손길, 간호사 선생님의 인자한 미소에 불쑥 눈시울이 붉어졌다. 병원에 와서 이런 감정이 든 적도, 괴로워서가 아닌 기뻐서 운 것도 임신하고 처음이었다. 그저 모든 게 감격스럽고 감사했다.


집에 오는 길엔 태국 음식점을 들러 팟타이를 시켰다. 배가 고팠는지 후루룩 잘 들어갔다. 남편 전화를 받는 내 목소리엔 설렘과 들뜸이 묻어있었다.

“건강하다는데 눈물이 찔끔 나더라. 나 사실은 열무(태명)를 좋아했나 봐. 열며든 것 같아.”기분 좋게 소식을 전하고 그릇을 싹싹 비웠다. 오후엔 다이어리에 초음파 사진을 붙이고, 짧은 일기도 썼다. 아기 머리 크기도 자로 그렸다. 아마도 그날이었을 것이다, 나의 모성애가 시작된 순간이.


나는 '애착'이 '애증'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내가 정의하기에 애착이란 한 사람이 그의 본능 혹은 필요, 취향, 긍정적인 경험, 좋았던 기억 등에 따라 어떤 대상을 한없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껴주고 싶은, 돈과 시간을 들여도 아깝지 않고 더 자주, 오래 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모성애도 마찬가지였다. 본능적으로 타고났든, 간절하게 원해서든, 키우며 정이 들든 그것의 이유와 정도는 제각각이어도 '좋음'으로만 구성된 짙은 사랑이라는 점은 똑같다고 믿었다. 아이가 자라면 감정이 복잡해지겠지만 적어도 갓난아기를 향한 엄마의 마음은 순도 100% 애정일 터였다. 그게 바로 모성애의 정의이자 본질인 줄 알았다. 그러니 만약 나에게도 모성애가 생긴다면 그 시작은 분명 (아기의 귀여운 외형이나 사랑스러운 행동 따위에서 오는) 호감에서 비롯되리라 예상했다.


실상은 반대였다. 나의 모성애는 고통에서 시작됐다. 지독했던 입덧과 환도 통증, 그로 인한 아픔, 짜증. 원하는 걸 못하는 데서 오는 답답함, 슬픔, 무력감. 임신 초기부터 몰아친 험난한 과정이 내 안에 숨어있던 오기와 보상 심리를 제대로 자극했다. 어느 날 찾아온 갑작스런 복통은 아이를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을 주었고 비로소 그때 나는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이어진 각종 검사-기형아, 정밀 초음파, 임신성 당뇨 검사-를 할 때면 매번 롤러코스터를 타고 불안과 공포, 안도를 넘나들었으며 그렇게 퀘스트를 하나씩 깨면서 아이의 건강한 탄생을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다. 내가 고생할 때마다, 내 몸뚱이가 희생할 때마다, 내 시간과 에너지를 내어줄 때마다 애착이란 감정이 한 겹씩 차곡차곡 쌓였다.


성경 속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선악과를 따먹는다. 이에 대해 하느님은 아담에겐 노동의 저주, 이브에겐 출산의 고통이란 벌을 내린다. 임신하고 처음엔 괜히 이브를 원망했다. 언니 왜 그랬어,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임신과 출산이 힘든 건 신의 큰 그림 같다. 신도 아는 것이다, 애착이 어디에서 오는지. 나는 희생도 양보도 원한 적이 없다. 얼떨결에 어떤 배에 올라탔을 뿐이다. 그 배는 어느 날 느닷없이 나를 태우고는 내 체력과 일상을 모조리 앗아갔다. 때문에 나는 원래 하던 일을 멈추고, 다른 데 한눈팔 여유도 없이, 엄마가 되는 과정에만 집중했다. 그러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도착해 있었다, 모성이란 낯선 섬 한가운데에. 임신 중에도 이런데 출산 후엔 어떨까. 내 몸이 망가질수록, 고초를 더 겪을수록 아이에 대한 애착이 심해질 것 같다.


그러니 이제야 이해된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라며 생색내는 부모, 육아가 너무 힘들다는 투정과, 자식을 자기 뜻대로 키우려는 통제 심리, 학교에서 마주한 모성애의 이상한 단면까지. 왜 저렇게 극성이지? 왜 아이만 보고 살아? 덜 해주고 덜 바라면 되잖아. 일찍 독립시키고 내 인생 살면 되잖아. 본인이 선택해서 낳아놓고 뭐가 그렇게 억울할까, 생색도 덜 내고 효도도 안 바라면 좋을 텐데. 이게 안 되나?


안 된다. 그게 안 된다. 보통의 관계처럼 적당히 거리 두고, 서로 선 넘지 않고, 원하는 만큼만 잘해주면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임신을 한 순간부터 엄마는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몸과 마음을 갈아서 자식을 길러내며, 정신적 압박과 신체적 한계에 끊임없이 부닥친다. 그래서 쿨할 수가 없다. 생색내지 않을 수가 없다. 주변을 두루 살피고, 내 아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바라는 것 하나 없이 느긋하게 지낼 수가 없다. 고통으로 빚어내는 사랑은 징그러울 정도로 진하고 단단하기에 점잖은 모성애, 무던한 엄마는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처럼 불가능한 조합일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유튜브에 아기 영상이 뜨면 지나치질 못 한다. 길 가다 어린 아이를 만나면 한참 바라보게 되고, 우리 아기는 어떨지 궁금해진다. 태동이 느껴질 땐 배 안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 같다. 아기는 물고기고 나는 바다다. 내가 바다라니, 누군가를 품기엔 속도 좁고 그릇이 작은 사람인데.. 전엔 준비되지 않았으니 낳고 싶지도 않았는데, 이젠 부족하더라도 직접 부딪히면서 배우고 채워가고 싶다. 아기를 안아주려고고 저녁마다 팔 운동을 하고, 순산을 위해 아파트 계단을 오른다. 되도록 모유수유도 해주고 싶다. 이 모든 게 임신 소식을 처음 접했던 몇 달 전의의 나로서는 상상도 못 했던 변화다.


한편으론 이러다 아이를 너무 사랑하게 될까봐, 그래서 집착하고 옭아매면 어쩌나 걱정도 된다. 뭐가 됐든 나를 갉아먹는 건 싫기에 한 발 물러서서 커지는 마음을 경계하고 싶다. 그러나 이런 바람이 무색하게 나는 또 배에 올라탈 것이다. 나를 양분 삼아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를 지켜보며, 그렇게 한참 흘러갈 것이다. 그 배가 얼만큼 멀리 갈지, 어디에 도착할지 모르겠지만 기꺼이 항해를 이어가길, 고통만큼이나 행복과 즐거움을 발견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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