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초기 나에게선 모성애의 'ㅁ'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으로 1학년 담임을 맡아 어수선한 데다 고학년과 차원이 다른 천진난만함에 기진맥진한 시기였다. 자신감이 바닥을 쳐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일은 물론이고 낳거나 키울 엄두는 더더욱 안 났다. 예상치 못한 임신에 기쁨보단 두려움이 앞섰고 입덧이 시작되자 그저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었다. 걱정만 산더미라 태교나 육아엔 도통 관심이 안 갔다. 뱃속의 아이를 생각하라거나 홀몸이 아니니 조심하라는 말을 들으면 괜히 반발심이 올라왔다.
나만 이런 걸까. 임산부 커뮤니티에선 비슷한 주수의 사람들이 초음파 사진을 자랑하고 있었다. 새까맣고 흐릿한 사진을 보고 ‘귀엽지 않나요?', '드디어 젤리곰이 됐어요!'라며 감탄하는데 난 아무 감흥이 없었다. 내눈에 아기집은 블랙홀, 아기는 강낭콩 같았다. 신기하긴 해도 귀엽다는 말은 안 나왔다. 또 나는 입덧 수액 효과 / 임산부 편한 속옷 등 철저히 나를 위한 정보만 찾고 있는데 누구는 참치캔을 먹으면 아기에게 해로운지, 누구는 태아보험을 뭘로 가입해야 하는지 궁금해했다. 밤마다 태담을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반면 나는 배에다 이름을 부르거나 말을 거는 게 낯간지러웠다. 평소엔 mbti 대문자 F(감정형)면서 이 문제에서만큼은 지독한 T(사고형)가 된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어느 때보다 감정적이었다. 그때의 나는 부정적 감정의 총체였다. 인사이드 아웃으로 치면 모든 캐릭터가 날뛰는데 기쁨이만 이민 간 상태였다. 특히 영화엔 없는 자책이와 반성이가 등장해 주로 활약했다. 내 머릿속엔 나는 죄를 지었고 그래서 벌 받고 있으며 진작 자궁 안에 루프를 심어버렸어야 했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 와중에 입덧으로 죽을 둥 살 둥 하니까 일단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니 솔직히.. 아기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속이 안 좋아 뜬눈으로 지새운 어느 새벽, 남편을 깨워 우리 3년 후에 다시 갖자고, 정 아이를 원하면 그때 낳아주겠다고 호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2주쯤 지나자 마음이 바뀌었다. 입덧은 똑같이 극심했고 못 먹어서 살이 쪽 빠졌지만 뭐랄까, 물러서기가 싫었다. 여태 견딘 게 아까웠기 때문이다. 몇 년 후에 다시 임신? 그럼 입덧을 또 해야 하는데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끝까지 해내서 임신출산이란 과정을 신속히 졸업하고 싶어졌다. 두 달을 버티니까 입덧이 멎었고, 환도 통증이라는 새로운 고난이 닥쳤지만, 그래도 퀘스트 하나를 깬 기분이었다.
이제는 무조건 아이를 낳을 것이고, 그 아이는 건강해야만 했다. 내 몸뚱아리가 이렇게나 희생했으니까. 내 시간, 에너지 그리고 체력을 온전히 내어줬으니까. (뒤지게) 고생했으니까.
그 사이 강낭콩이었던 아기는 머리와 팔다리가 생겨 제법 인간의 형태가 되었고 그제야 초음파 사진을 몇 번이고 들여보게 됐다. 심장 소리는 들을 때마다 적응이 안 되고 아무래도 주작 같았지만(?) 쪼끄만 게 열심히 숨을 쉰다니 꽤 깜찍하고 소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오른쪽 아랫배가 아팠다. 장염이나 방광염, 생리통에서도 겪어본 적 없는 신박한 통증이었다. 사타구니 쪽이 딱딱하게 뭉치면서 콕콕 찌르는 느낌. 의학적 지식은 없어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여기가 자궁이로구나. 아기가 있기엔 너무 아래쪽이라 긴가민가했지만 임신 때문인 게 분명했다. 늦은 밤이라 병원 문은 닫았는데 통증이 계속 돼서 잠이 안 왔다. 처음으로 인터넷에 '유산'을 검색했다. 줄줄이 나오는 유산의 원인, 증상, 후기를 읽자... 미친 듯이 불안해졌다. 내가 너무 무심했나, 아기를 안 예뻐해서 하늘이 벌을 주나, 입덧이 벌인 줄 알았는데... 안돼, 정 들었단 말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말은 취소였다. 이젠 진짜 낳고 싶었다. 출산도 육아도 자신 없지만 아기를 만나고 싶었다. 분주히 응급실을 알아보는 나를 두고 남편은 괜찮을 거라며,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보자고 다독였다.
그렇게 세시쯤 겨우 잠들었는데, 바로 악몽을 꾸는 바람에 금방 깼다. 꿈에서 나는 더글로리 문동은이고 뱃속의 아기는 손명오 자식이었다. 손명오가 나를 비웃고 조롱해서 벌떡 일어났다. 아주 끔찍한 꿈이었다...
~다음 화에 이어집니다~
*또 악플 달릴 것 같지만.. 허허.. 저는 이런 솔직한 임신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글 쓰는 이유가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을 또 다른 임산부에게 위로와 공감을 전하고싶어서예요. 제 글이 불편하심 다른 데로 가시면 됩니다! 인터넷에 좋은 엄마, 착한 임산부들 정말 많으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