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생산적인 삶은 나쁜가 /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 배움의 진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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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에서 나태는 죄악이다. 다들 돈 많은 백수가 꿈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산다. (미디어를 보면 이미 돈이 많은 사람들도 굉장히 부지런해 보인다.) 자기개발서에선 최대한 효율적, 생산적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SNS에선 운동과 독서, 재테크가 유행이다. 하루를 쪼개어 최대한 유익하게 운용하고, 본업은 물론 부업과 사이드잡으로 추가 수익을 내며, 그러면서 건강과 취미도 놓치지 않는 삶이 이상적인 듯하다. 우리 사회에서 '성실하지 않음'은 '성장하지 않음'을, 이는 곧 무능과 도태를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아무것도 안 하면 죄를 짓는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으면 불안하다. 나부터가 너무도 쉽게 나 자신을 한심하다고, 쓸모없다고 단정 짓는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이 등장한 지는 사실 얼마 안 됐다. 중세 유럽에서는 노동이 원죄의 대가이자 형벌이었다. 귀족들에게 직접 장작을 나르거나 음식을 만드는 일은 체면을 깎는 행위로 여겨졌다. 대신 그들은 남는 시간과 돈을 누리며 시와 음악을 즐겼다. 게으름과 나태는 죄가 아닌 미덕이었다. 만약 내가 중세 귀족이었다면 어땠을까? 일도 안 하고 한가로이 정원에서 차 마시고 파티나 다니며 하루를 보냈을 텐데, 이런 내 생활이 비생산적이라며 자괴감에 빠졌을까? 열심히 사는 자들을 부러워했을까?
지금 내 모습이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좀 별로일 수는 있다. 근데 꼭 여기에 갇힐 필요가 없다. 똑같은 형태의 삶이어도 시대와 문화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대와 문화라는 건, 물론 무시할 수 없지만 언제고 또 변할 테니, 나는 그저 내 상황에 맞게 살면 되지 않을까?
최근 영화감독 지망생들을 인터뷰한 책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김보라, 2018)을 읽었다. 우리나라에서 영화감독이 되려면 입봉 전까지 오랫동안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책 속 인터뷰이들은 연출 공부와 시나리오 구상을 하면서 생계유지를 위해 아르바이트도 병행한다. 영화를 꿈꾸지만 돈은 다른 데서 벌어야 하고, 시나리오를 쓰지만 이게 영화가 될지는 모르는 시기. 어찌 보면 비생산적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런 시간이 충분히 쌓여야 좋은 감독이 된다 믿으며 가난과 불안을 기꺼이 감내한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독서, 영화 감상, 인문학 공부 등의 활동이 창작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는 점이었다. 인터뷰이들은 공통적으로 축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내 안에 영감과 소재를 충분히 집어넣어야 하고 싶은 얘기가 생긴다는 것이다.
"인문학 공부를 정말 많이 했어요. 중요한 건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를 찾아내는 건데 인문학 공부는 그걸 찾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하고 싶은 얘기를 찾기까지) 정말 몇 년 걸리는 것 같아요."
지망생들은 창작의 근원을 쌓기 위해서는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출발점은 인문학이었다. 지망생들은 당장 생산적인 결과물을 얻을 수 없다 할지라도 시간을 들여 인문학 공부를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었다. (46쪽)
결국 대부분은 뭔가를 그냥 보고 있는 행위다. (...) 이런 행위는 보통 생산적인 행위로 규정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드라마를 몰아서 보거나, 만화책을 보는 것은 휴식을 취하거나 노는 행위로 여겨진다. 하루 종일 이런 시간을 보내고 나면 시간을 낭비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지망생들의 창작 활동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48쪽)
인풋을 모은 후에 이들은 아무것도 안 하기, 즉 멍 때리기 전략으로 넘어갔다. 몇 시간이든 가만히 있다 보면 머릿속이 재정비되고 시나리오가 그려진다. 휴식과 여가처럼 보이는 과정 안에서 영화의 기반이 잡히고, 채우기와 비우기를 반복하며 작품이 탄생한다. 영화감독이 되는 데에 지름길은 없다. 굽이굽이 휘어진 이 여정에서 생산과 비생산을 나누는 건 무의미하다.
여지껏 나는 '쌓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공부도 출근도 매일 '하는' 게 중요했고 일할 때도 투두리스트를 작성해서 하나씩 '해치우는' 데 집중했다. 책 속 인터뷰이들이 묵묵히 자기만의 자산을 쌓아가는 걸 보며 늘상 조급하게 종종거렸던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됐다. 그러고 보면 요즘이야말로 나에겐 축적의 시기 아닌가? 하루하루 덧없이 흘러가는 것 같아도 밑바닥엔 뭔가 쌓이고 있다. 우선 살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렇게 많이 읽고 쓴 적이 없다. 작년에도 독립 출판을 했지만 올해는 뭐랄까, 온전히 글 자체에만 집중하는 느낌이다. 갑작스런 임신으로 온갖 생각과 감정이 넘치는데 신체적 제약까지 더해지니 주구장창 읽고 쓰기만 한다.
그렇다고 내가 영화감독이 될 재목도 아니고, 누군가 "이런 게 쌓이면 경력이 돼? 돈이 생겨”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어차피 내가 원한 건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며 나답게 사는 삶이었다. 교사를 관두고 이직하고 싶은 맘이 굴뚝같지만 그건 악성 민원에 대비할 선택지를 두기 위함이지 돈과 경력을 좇아서가 아니다. 그랬다면 애초에 독립 출판 같은 건 하지 말고 에듀윌에 갔었어야 한다. (물론 임신을 안 했다면.. 천천히 고민해서 다른 직업을 준비했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니 생각말자) 내 미래에 관해선 한 치 앞도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지금이 무용한 나날로 남을지 생산을 위한 축적으로 남을지는 나에게 달려있다.
그리고 상담 예찬론자인 나는.. 임신 직후와 마찬가지로 상담 선생님과 긴 대화를 나눴다.
나: 요즘 너무 비생산적이에요. 휴대폰만 하고 쇼츠도 많이 봐요. 계속 쇼핑하고.
선생님: 그래서 어떤 게 제일 불만족스러워요?
나: 배움이 없는 거요. 발전도 안 하고 고여있는 제 자신이 불만족스러워요.
선생님: 00 씨가 생각하는 배움은 뭐예요?
나: 어렸을 땐 강의 듣고, 문제 풀고 과제하면서 뭔가를 배웠던 것 같고요, 이제는 여행을 거나 좋은 사람과 대화할 때 배움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선생님: 배움을 통해서 뭘 얻을 수 있죠?
나: 영감이나 지식이 생기지 않을까요. 새로운 경험도 하고, 즐거움도 얻고요.
선생님: 그럼 영감, 지식, 경험을 얻을 수 있다면 꼭 여행을 가거나 강의를 듣지 않아도 배움이라 할 수 있겠네요? 기존에 00 씨가 해왔던 방식과 달라도요. 하루 종일 집에 있고 침대에 누워서 휴대폰을 하더라도 이 과정에서 뭔가 배울 수는 있잖아요.
나: (아...)
선생님: 제가 보기에 00 씨는 충분히 다채롭게 살고 있어요. 물론 의미 없는 시간도 있겠죠. 그런 순간이 있을 뿐이에요. 전체를 놓고 보면 지금 00 씨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적응하고 성장 중이에요. 나 자신을 극단적인 한 문장으로 설명하지 마세요.
정말이지 맞는 말이었다. 어떤 형태든 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만 있다면 그게 곧 배움이다. 꼭 강의를 듣거나 자격증을 따지 않더라도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배울 수 있다.
요약하자면,, 1. 생산성이라는 개념에는 성별 권력이 확실히 작용한다. 남성의 기준으로만 나의 생산성을 평가하지 말자. 2. 생산성이 항상 추앙받았던 건 아니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게으름이 미덕이었던 적도 있다. 그러니 21세기 한국 사회의 기준에 따라서 나를 후려치지 말자.
그리고 3.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어도, 내 안에 뭔가를 넣는 과정 또한 생산이다. 장기적으로 꼭 필요한 과정이다. 효율적으로 생산적인 것만 딱딱 하면서 살 수는 없다. 특히 창작자가 될 거라면 인내와 여유를 가져야 한다. 뭐가 나중에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이렇게 정리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임신도 육아도 좀 더 느긋하게 바라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