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 경제학이 남성 중심이니까
앞서 언급했듯 임신하고 부쩍 나라는 사람의 생산성을 의심하게 됐다. 여태껏 공부, 시험, 취업, 노동으로 이어지는 눈앞의 과제를 정신없이 해치우며 살아왔다. 뻔하다고 느끼면서도 꾸역꾸역, 성실히 해냈다. 이렇게 긴 기간 쉰 적은 처음이다. 인생에서 한 번쯤은 이런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방구석에 누워 휴대폰만 하는 나 자신을 보면 뭐랄까, 어른 구실을 못하는 느낌이 든다. 자고로 성인이라면 자기 먹고살 돈을 벌며 1인분의 몫은 해야 하지 않나. 꼭 미라클모닝이니 뭐니 하며 아침에 일어나 부산 떨 필요는 없어도, 최소한 일은 하고, 일 안 할 거면 다음을 위해 자신을 갈고닦고, 쉴 거면 외국 여행을 가든 한달살기를 하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
이런 얘기를 하면 남편은 나도 지금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면서, 한 생명의 심장과 손가락 발가락을 만들고 있으니 이 자체만으로 얼마나 대단하냐고 위로하지만 그게 그렇게 와닿진 않는다. 물론 뱃속의 아기가 자라는 과정은 숭고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신비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성과'라 여겼던 것과는 다소 결이 다르고, 솔직히 실감도 안 난다. 점수, 등급, 연봉처럼 딱 떨어지는 결과로 가득 찬 요즘 세상에서 임신은 너무나 추상적이다. 불러오는 배와 초음파 사진을 보면 뭐가 일어나는 것도 같은데, 이게 뭔지,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이직하고 싶었는데 젊은 날을 이렇게 보내다 기회를 놓칠까봐 걱정이다. 하던 일이나 잘하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비생산적인 시간을 보내다 비생산적 인간이 되는 나'를 상상할 때면 이내 무력해진다. 다행히 맘카페나 인스타툰, 유튜브에 비슷한 사연이 많아 외롭진 않다. 하긴 일 욕심이 있는 여자라면 누구나 이럴 수밖에, 아니 우리 세대가 자라온 환경을 고려하면 누구든 임출육(임신/출산/육아)을 거치며 ‘현타'를 느끼지 않을까. 돈이나 승진에 관심 없더라도 말이다. 평생 '열심히 살아! 하루하루 알차게 보내. 운동도 하고 자기계발도 놓치지 마.'같은 메시지에 치이다 갑자기 '임신은 축복이고, 뱃속의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야 하니까, 마음 편안하게 쉬면서 육아를 준비하세요.'라니.. 그나마 나는 돌아갈 직장이라도 있지 임출육으로 경력이 단절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떨지 감히 짐작할 수도 없다.
https://youtu.be/N7-CF-U6bqU?si=Q0d5eFR2TPRVKU_o
심란한 감정으로 품은 질문은 진지한 탐구 주제가 되었다.
생산성이란 무엇인가? 임신, 출산, 육아는 정말 비생산적인가? 비생산적인 삶은 나쁜가?
몇 주간 여기에 꽂혀 상담을 받고 책을 찾아 읽었다. 그 결과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생산성에 관한 정의를 다시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만의 개똥철학이지만 분명 누군가에겐 도움이 될 테니 잘 정리해서 나누려 한다. 방구석 세바시 강연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단위 노동을 들여 만들어 낸 생산물의 양.' 생산성의 사전적 정의다. 원래 경제학 용어인데 개인의 효율성과 성과가 중요해지며 일상어로 자리 잡았다. 언뜻 보기에 임신은 생산성과 동 떨어진 것 같다. 노동도 아니고, 돈을 벌지도 않으니. 외려 여성의 경제 활동이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멈추기도 하므로 임출육은 비생산적 행위처럼 보인다.
그런데 만약 임신이 노동이라면 어떨까? 아기가 생산물이라면? 경이로운 생명의 탄생에 경제적 잣대를 들이미는 게 께름칙하지만 이런 식의 접근도 중요하다.
스웨덴 기자 카트리네 마르살은 <잠깐 애덤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라는 책에서 남성 중심으로 발달한 기존 경제학이 오랫동안 여성의 노동과 생산을 소외시켜 왔다고 꼬집는다. 마르살에 따르면 여성들은 단 한 번도 일을 쉰 적이 없다. 산업 전선에 뛰어든 1960년대 이전부터 여성들은 자녀 양육, 청소, 빨래, 다림질 등 가족을 위한 활동을 계속 해왔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이 이를 사적 영역으로 묶어버리고 경제적 활동으로 간주하지 않았을 뿐이다.
경제학에 따르면 한 여성이 새벽부터 나가 양동이에 물을 채워오는 것도, 땔감을 모으고 설거지를 하는 것도, 채소를 수확하고 저녁을 짓는 것도 전부 '비생산적' 행위다. 하루 종일 온갖 일을 했어도 이 여성은 여전히 '비경제적' 존재다. 생산적, 경제적 가치를 증명하려면 남성이 남성을 위해 만들어 낸 노동 시장에 들어가야만 한다.
마르살은 경제 전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이제부터라도 여성의 활동을 무시하지 말고, 가사 노동도 GDP에 포함하자고 주장한다.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돌보는 일은 경제 번영의 기반이 되므로 더 이상 이를 무보수 천연자원으로 취급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제2의 성'이 있듯 '제2의 경제'가 존재한다. 전통적으로 남성이 맡아 온 일들은 의미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시각이 경제학적 세계관을 정의한다. 여성의 일은 '그 외의 일'이다. (...)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절반의 답을 찾은 데 불과하다. 그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상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어머니가 매일 저녁 식사가 식탁에 오를 수 있도록 보살폈기 때문이다.
-카트리네 마르살, <잠깐 애덤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우리나라에서 전업주부는 어떤 이미지인가. 남편이 벌어준 돈을 '쓰기만' 하는 존재, 아이들을 기관에 보내고 브런치 카페에서 수다 떨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집에서 노는 사람. 요즘엔 외벌이 부부라고 하면 여성이 '취집'에 성공했다며 비아냥대거나 퇴근 후 설거지를 도와주는 남편을 '퐁퐁남'이라 조롱하기도 한다.
전부터 나는 여성의 일이 이런 식으로 과소평가되는 게 부당하다 여겼다. 전업주부셨던 할머니와 엄마가 놀기는커녕 죽어라 고생만 한 걸 직접 봤기 때문이다. 어쩌다 우아하게 브런치를 먹더라도 그건 잠깐의 여유일 뿐 그 뒤엔 괴로운 노고가 따른다. 아이들을 잠시만 돌봐도 금세 깨닫는다. 직장 생활과 육아 중 어느 것이 더 쉽다 말할 수 없음을. 여성의 수고와 기여는 누구도 감히 폄하할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머리로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사실 나 역시 어떤 고정관념에 갇혀있었던 것 같다. 정작 나 자신이 전업주부가 되는 건 질색했기 때문이다. ‘가사 노동도 중요합니다, 그러니 남성도 참여하세요. 아이도 부부가 같이 키우고요. 임출육을 이유로 경력이 단절되어선 안 돼요, 여성들이여 계속 일하세요.‘가 그간 나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결혼을 해도 딩크로 살든 늦게 낳든 남편이 키우든 바득바득 내 일을 해야겠단 결심이 뚜렷했다. 그러니 임신하고 몸이 안 좋아 집에서 쉬게 되자 좌절이 컸던 것이다. 남들이 전업주부를 욕하는 건 참을 수 없지만 내가 그렇게 살기도 싫으니까. 할머니와 엄마를 존경하지만 나는 다르게 살고 싶으니까. 결국 나 또한 가사 및 돌봄 노동을 내심 무시한 게 아닐지. 그게 아니면 임신해서 집에 있는 내 모습을 그렇게까지 한심하게 보지 않았을 테다.
책에 따르면 임신도 출산도 육아도 경제가 굴러가는 데 빠져서는 안 되는 필수 요소다. 집안일도 마찬가지다. 단지 우리 사회가, 경제학이 이를 값지게 여기지 않을 뿐이다. 비인간적이라 욕먹을 각오를 무릅쓰고 이 모든 걸 돈으로 치환한다면? 일일이 값을 매긴다면 어떨까? 임신 기간 집에만 있는대도, 아무것도 안 한대도 그 가치는 한 사람의 연봉을 훌쩍 뛰어넘을지도 모른다.
삼십 대 초반을 임출육에 허비하면 이직이 어렵겠단 나의 예측도 어느 정도는 편견이다. 책에 이런 내용도 나온다. 가사노동을 맡았던 사람이 직업 경험 면에서 뒤떨어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가정을 운영하며 부모는 다양한 역할을 해내고 여러 역량을 갖추게 되므로 도리어 시장에서 유용한 인재로 거듭날 수 있다. 나 또한 눈에 보이는 수치나 스펙은 뒤처지더라도 내면은 놀랍도록 성장할 것이다. 아이를 낳고 키워본 경험은 내가 다음에 무슨 일을 하든 도움이 될 게 분명하다. 그러니 마음을 편히 가져도 된다. 진정으로 여성의 일이 존중받길 원한다면 나부터가 균형 잡힌 시각을 가져야 한다. 직장 생활도, 집안일도, 돌봄 노동도 모두 가치 있다 믿어야 한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무슨 일을 하든 깔보지 말자, 초라하게 느끼지 말자. 나는 언제나 중요한 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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