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쭉 대전에 살았던 나는, 대전이 살기 좋고 마음 편한 곳인 걸 알면서도 맹목적으로 "인서울"에 집착했다. 고등학생 때 스터디 플래너 보면 그날의 다짐 같은 곳에 '홍대 붐바 가서 그레이 만나기' 'AOMG 소속사에서 청소 아르바이트 하기' '연고전에서 트월킹하기' '휘문고 졸업한 남자랑 사귀기' 같은 괴상한 다짐이 잔뜩 써있다. 힙찔이 감성과 학벌주의가 뒤섞여 서울에 대한 집착을 만든 건 아니었을까.. 와중에 주제도 모르고 지방의대는 싫다거나 카이스트는 안 간다는 허세를 부렸다(어차피 둘 다 절대 못 갈 수능점수를 받았다).
그렇게 겨우 서울에 상경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까지 하며 자리를 잡았다. 서울은 어떤 곳인가. 신촌 홍대 이태원 을지로 성수 가는 곳마다 분위기가 다르고 어디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다채롭고 화려한 도시, 여기에 고궁의 고즈넉함까지 누릴 수 있는 완벽한 곳. 서울에 질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같았다.
그중에서도 서촌을 좋아했다. 나의 영감이자 위안이 되어주는 곳이었다. 갈 때마다 골목 곳곳에 매료되어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그렇게 해방촌, 한남동, 연남동에 빠져들었다. 예쁜 카페, 독립서점, 공유 작업실, 전시회를 다니며 이런 인프라를 누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반면 강남 서초는 내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잠실도 마찬가지.. 빽빽한 고층 건물에 둘러싸여 매연을 들이키고 있으면 숨이 안 쉬어졌다. 프랜차이즈로 빼곡한 거리, 명품 팝업스토어와 그 앞에서 사진 찍는 중국인들에는 관심이 안 갔다. 무엇보다 열등감 많은 나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주변 집값.. 20억 30억, 요즘엔 70억까지 육박하는 아파트단지를 보며 포도를 까내리는 여우처럼 괜히 강남을 더 싫어하게 됐다.
문제는 나의 서울 생활이 대부분 강남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우리 대학교는 대학 치고 크기가 굉장히 작은데 와중에 서초구 노른자땅에 위치해 다른 대학에서 탐을 내는 곳이었다(라고 교수님들이 말씀하셨다). 기숙사에서 살았으니 내 생활반경은 강남역, 서초역, 롯데빌리지 주변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아르바이트도 그 근처에서 하게 됐고, 서빙해줄 손님이나 과외하러 간 학생을 보면서 차츰 부의 격차를 체감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한다면 그건 이태원이나 홍대 쪽이 되길 바랐지만 가혹하게 신규발령도 강남으로 났다. 대치동 근처 치열한 학군지에서 일하게 됐고, 공무원 월급으로 직주근접할 원룸을 구하는 과정에서 서울에 신물이 나버렸다. 일에 질린 건지 사람에 질린 건지 돈에 질린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원인을 죄다 도시로 돌렸다. 직장인이 되고 보니 대학생 때의 설렘과는 또 다른 감정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태원을 생각하면 더이상 설레지 않았다. 이태원까지 가는 길, 3호선에서 6호선으로 갈아타는데 중간에 약수역에서 델리만쥬 냄새에 한번 혹하고 도착해선 사람에 치이는 피로함..이 떠올랐다. 연남동을 생각하면 2호선에 비집고 타다가, 홍대입구에서 내리면 다들 거대 올리브영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횡단보도 건널 때 오토바이가 부왕하고 지나가는 정신없음이 떠올랐다. 거기서 좀 더 가면 허름한 횟집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는 진광경을 볼 수 있지. 방어가 유명하다고 했나. 경의선 숲길에 강아지가 많으니 그건 기분 좋을 수도 있겠다 싶어 피식 웃긴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엔 또 2호선이야. 상상만으로도 지친다..
서울의 낭만이 퇴색되었다. 여전히 서울은 다채로운 곳이고 뭔가가 끊임없이 생기며 집값은 떨어지지 않을 부동산 불패의 도시지만, 전국의 혁신적인 사람들 힙한 사람들 온갖 사람들이 모인 재밌는 동네지만, 난 지쳐버렸다. 연애라도 했으면 뭐가 좀 달랐을까. 하필 오래 만난 남자친구는 대전에 살았다.
남자친구를 만나러 대전에 갈 때마다 묘하게 치유를 받았다. 고등학생 때의 내가 알면 치를 떨 일이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나는 대전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부모님과 남자친구가 있는 곳. 부동산 강의를 들으며 임장을 하러 다니지 않아도 몇년만 착실히 모으면 집을 살 수 있는 곳. 크리스마스에 신세계 백화점에 가도 한가롭게 야경을 구경할 수 있는, 어디든 어지간하면 주차 자리가 있는 여유로운 곳에 살고 싶었다.
그래도 서울에 있는 게 맞지 않을까, 어떻게든 자리를 잡으면 40대쯤엔 눌러앉을 수 있겠지.. 서울에서 직장생활하고 대전에서 쉬니까 착각하는 건 아닐까, 대전도 일터가 되면 똑같을 거야, 어쩐지 대전으로 오는 게 선택이 아닌 '포기' 혹은 '굴복'인 것 같아 망설일 때 쯤 두번의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도쿄와 하코네 여행, 오사카와 교토 여행. 두번의 여행에서 나는 압도적으로 후자가 좋았다. 말할 것도 없이 하코네와 교토가 내 취향이었다. 도쿄랑 오사카는 한번 간 걸로 족했지만, 하코네와 교토에선 오랫동안 살고 싶었다. 그러자 서울이 아닌 대전에서 살고싶어하는 내 바람에 비로소 확신이 생겼다. 도톤보리에 치를 떨고 가모가와 강에 환장하는 사람이라면 서울이 편안할 리 없잖아..! 그러면서 우리나라엔 왜 '교토'가 없을까, 인구 분산이 중요하다면서 서울을 떠나려는 사람을 찝찝하게 만드는 서울공화국 이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세번째 일본 여행에서 나는 쿨하게 오사카를 버리고 교토에서만 3박을 묵었다. 교토는 '교토 부심'이 있다. 사람들은 차분하고 겸손하지만 도시 전체에 교토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뚝뚝 묻어난다. 간판에, 카페에, 숙소에.. 책을 좋아해 일본어도 모르면서 교토의 서점을 다녔는데 갈 때마다 교토 잡지가 있었다. 교토 관광 잡지, 교토 카페 잡지, 교토 빵 잡지 등등.. 우리나라에 이런 도시가 있었나? 대전 서점에 가면 대전에 관한 잡지를 파나? 이렇게 다양한 종류로, 힙한 디자인으로 대전에 대해 소개한다면 어떨까.
냉큼 맘에 드는 교토 잡지를 사들고 결심했다. 나도 대전 잡지를 만들자! 인디자인이 어려우면 소책자 형식도 괜찮다.
그리고 결국 대전으로 내려왔다. 직장도 집도 바꿔버린 채.
-영화 레이디버드의 한 장면.
이 영화 처음 나왔을 때 주인공이 새크라멘토 싫다면서 뉴욕으로 바득바득 대학 원서 지원하는 게 너무 공감됐다. 새크라멘토를 누구보다도 떠나고싶어하지만 사실은 깊이 사랑하고 있는 주인공.
애초에 "~~가 너무 싫어 여길 꼭 떠날 거야"라는 말도 거기에 소속감을 느끼고 있으니 할 수 있는 말이다.
여기에 이동진 영화평까지 죽여주는데
아 저러고 뉴욕 가자마자 현타 와서 엄마한테 전화하는 것도.. 인상 깊다.
교토에서 사온 잡지가 바로 요놈. 일본어 까막눈이라 뭔말인지 당최 이해 못하지만 잘 보고있다.
다음 에피소드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