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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 기록

[독서기록] 해가 지는 곳으로 후기 / 필사

by 화랑

최진영 - 해가 지는 곳으로


손에 쥐자마자 단숨에 끝까지 읽은 책. 술술 잘 읽히고 몰입도가 엄청나다.


전염병을 소재로 다뤄서 한창 코로나19가 유행했을 때 자주 언급 됐는데, 그땐 안 읽었다. 뒤늦게 이 책을 찾은 이유는 다음주 대전 독립 서점에 최진영 작가님이 오셔서! 유명한 작가의 북토크니 가보고싶긴 한데 적어도 대표작 하나쯤은 완독해야 할 것 같아서.. <구의 증명>은 호불호가 심하게 갈린다길래 요놈으로 결정했다.


전염병이 배경의 시작이긴하지만 주된 내용은 아니다. 그보단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의 윤리와 상식은 어디까지 무너지는지와 그럼에도 어떻게 희망과 사랑을 지키며 살 수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세상이 망하는 와중에도 삶의 존엄을 지키는 자, 오히려 꿈과 자유를 찾은 자, 이제야 가까운 관계의 소중함을 깨달은 자의 이야기다. 그리고 사랑. 특히 사랑을 빼놓을 수 없다. 디스토피아에서 펼쳐지는 여성 두 명의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지구 끝의 온실>도 떠올랐다. (여성 작가가 쓴 여성 서사는 언제나 옳다!)


참으로 훌륭한 책인데, 쫄보에 개복치라 해리포터도 못 보는 나는 책 읽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일단 강간 얘기가 너무 많이 나온다.. <위저드 베이커리>도 흡입력은 좋았지만 강간 묘사가 나와서 불쾌했는데..ㅜ 하필 저녁부터 밤까지 쭉 읽는 바람에 자는 내내 계속 생각났다.. 나같은 사람은 비추요..


그래도 완전히 빠져들어서 중간 중간 오열도 하고(?) 여운도 짙게 남았다.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을 때와 비슷하게 인간이란 야생 상태에서 이 정도밖에 안되는 존재구나 싶어 무서우면서도, 지금 내가 사는 시대와 환경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베란다 문을 열어 바깥을 바라보니 새삼 세상이 정상적이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물론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선 책에 나오듯 잔혹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필사


안다. 불행해서 그렇다는 걸. 죽음에 억눌려 있다는 걸.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고 미래를 전망하기도 힘들어서라는 걸. 그래서 난 더더욱 불행을 닮아 가고 싶지 않았다. 삶을 업신여기고 싶지 않았다. 죽음이나 삶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을 어떤 잘못이나 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으로는 엄마의 죽음도 나의 삶도 견뎌낼 수 없다. -p37


어느 밤 고백 성사라도 하듯 건지가 말했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고, 아빠도 없고, 모두가 공평하게 불행한 지금이 차라리 홀가분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고. 적어도 지금은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만약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학교에 다닌다면 이젠 누구에게도 맞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그런 만약 같은 건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다고. -p37


도리가 내게 그것을 주어서 내가 그것을 얼마나 원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황량하게 얼어붙은 대지 위에서, 끝도 없는 길 위에서, 불행과 절망에 지친 사람들 틈에서 나는 바로 그런 것을 원하고 있었다.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지만 나를 좀 더 나답게 만드는 것. 모두가 한심하다고 혀를 내두르지만 내겐 꼭 필요한 농담과 웃음 같은 것. -p43

나도 가치 검사했을 때 최우선 가치가 '웃음'이었다. 그래서 재난 속에서도 웃음과 립스틱, 크리스마스 카드를 소중히 여기는 지나에게 공감했다.


지나는 담요를 매일 탈탈 털어 잘 개켰고 털모자를 쓰기 전엔 머리를 빗었다. 통조림 하나를 먹더라도 허겁지겁 퍼 먹거나 입에 들이붓지 않았다. 정갈하게 그릇에 담아 단정하게 앉아서 천천히 씹고 삼켰다. ...(중략)... 황폐한 길 위에서 바람을 등지고 앉아 구운 감자 한 알을 먹는 게 분명한데도, 지나가 무언가를 먹는 모습을 보면 한가로운 주말의 단출한 저녁 식탁이 떠올랐다. 타고난 여유였다. 야릇한 여유였다.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자기만의 품위를 지킬 사람. 그래서 지금 더 괴로울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지옥에서라도 수백 번 죽는 게 나은 사람. ...(중략)...

평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고, 이번이 마지막 식사가 될지도 모르잖아. 그럼 감자 한 알을 먹더라도 제대로 먹고 싶어지니까.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한 끼 한끼가 소중하다면,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중략)...

불행이 바라는 건 내가 나를 홀대하는 거야. 내가 나를 하찮게 여기고 망가트리는 거지. 난 절대 이 재앙을 닮아 가진 않을 거야. 재앙이 원하는 대로 살진 않을 거야. -pp54~55

좋은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인물을 사랑하게 만든다. 이 구절을 읽으면 누구나 지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도리와 건지가 지나에게 푹 빠진 게 백번 이해 된다. 특히 건지는 거의 뭐 지나 빠돌이 순정남인데 그걸 보며 ‘아 서브남이 여주 사랑하네, 뻔하네'가 아니라 '나 같아도 지나같은 여자는 평생 못 잊지'하며 애틋해졌다.


며칠 동안 도시를 뒤졌지만 지도와 사전은 찾지 못했다. 그리 안타깝지도 안달 나지도 않았다. 지도를 구하고 글씨를 알아볼 수 있게 되면, 어쩌면 지금보다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면 무엇이 나오는지 알게 되면 뭐가 달라지나. 목적지가 생길까. 오히려 혼란스럽지 않을까. 고민하고 갈등하고 주저하게 되지 않을까. 가고 싶은 곳과 피해야 할 곳과 쉬운 길이 정해지면 결국 남들처럼 움직이게 되겠지. -p154

디스토피아물은 이런 게 재밌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을 가정해서 거기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건데, 의외로 많은 부분이 현실과 비슷하다. 이 구절은 마치 인생 전체를 비유한 것 같았다. 많이 알수록 오히려 더 방황하는 게 삶이지.


난 언니를 혼자 두지 않아.

언니는 날 혼자 두지 않아.

언니가 잠에서 깨면 약속할 거야.

사랑한다고 약속할 거야. -p156

여기서 오열했다;; 거실에서 끅끅대니까 남편이 자다 나와서 놀랐다. "왜 그래?!" "책이.. 너무 슬퍼.."

소설에서 도리-지나 / 류-단 / 류-해민 / 지나-건지 / 건지-미소 / 지나-아버지 등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나온다. 메인은 당연히 도리-지나지만, 독자마다 가장 와닿는 사랑이 다를 것이다. 나는 도리-미소였다. 내가 친언니랑 사이가 좋다보니 미디어에 자매애가 나오면 유독 마음이 간다. 헝거게임도 그랬고.



끝으로


필사하고 보니 나 이 책 좋아하네.. 무섭고 끔찍했지만 명작은 명작입니다..


디스토피아물을 볼 때는 '왜 배경을 이렇게 설정했는가?'를 주목하게 된다. 단순히 재밌으려고? 인류에게 어떤 경고를 주려고? 최악의 상황에서 인간은 얼마나 원초적으로 움직이는지 보여주려고? 그런 점에서 1984, 헝거게임, 혹성탈출은 같은 디스토피아물이지만 전개와 성격이 전혀 다르다. 애초에 상황을 설정한 이유가 달랐기 때문이다.


<해가 지는 곳으로>에서는 미지근한 한국 사회에서 관성대로 살았던 인물들이 위기를 맞고 극한에 몰리자 오히려 용기와 희망과 사랑을 찾게된다. 학교 폭력 피해자였던 건지는 이제 누가 자신을 해치면 가만 있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먹고사는 일과 아파트 대출, 주변의 시선에 치여 가족을 돌아볼 틈이 없던 류는 비로소 아들과 남편의 소중함을 자각한다. 중간 중간 섬뜩한 장면이 나와 읽는 과정이 그리 유쾌하진 않았지만, 끝내 인정하게 된다. 참 따뜻한 소설임을. 결국 모든 건 소중한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등장했다는 것도.


작가로서 배우고 싶은 점도 많았는데 화자가 바뀔 때마다 문체도 달라진다. 지나, 도리, 류, 미소 시점의 말투가 다 다르다. 특히 미소는 시인이 꿈이라고 했는데 정말 문체가 시적이었다. 이슬아 작가 에세이 읽을 때도 느꼈는데 좋은 작가가 되려면 내가 구사할 수 있는 문체가 다양해야 하는 것 같다. 많은 재료를 갖고 적재적소에 쓸 수 있어야 한다.


결론은 최진영 작가님 북토크에 가고싶어졌다. 책에 관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이런 글을 쓰는 작가님이라면 어떻게 작업하고 생활하시는지 궁금하다.


<해가 지는 곳으로> 정리 끝!




혹시 해가 지는 곳으로가 재밌었던 분은 이 책도 추천
요것도 좋습니다


https://youtu.be/19oT04OuBhg?si=MraQZIVM5964xJPv

왠지 멸종위기사랑이 계속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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