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돌아다니고 싶다
16년 11월, 서울 자취방을 정리했다. 광주로 내려왔다. 입대가 12월이라 그래야만 했다. 정확히 그때부터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아주 조금, 딱 다리 뻗고 누울 수 있을 만큼의 공간만 제공되었다. 침상, 침대. 국방색 모포로 덮어놓은 공간까지만. 그 마저도 사방이 뚫려 다른 사람들과 많은 걸 공유해야만 했다. 새내기 시절 과 술자리가 재미없으면 눈치 보다가 기꺼이 집으로 도망쳤던 나에게, 자취방은 유일한 퍼스널 제국이자 대피소였다. 바깥이 가끔 너무 짜증나고 숨막혔던 내 유일한 취미는 집으로의 도망이었는데. 군대엔 그런 거 없으니, 난 밖에서만 살았다.
훈련소 수료했던 날에 울었다. 근데 울게 된 포인트가 좀 웃기다. 군가를 부르다 울었다. 빡빡머리가 된 채로 온갖 고생을 했었던 설움이나, 오랜만에 본 부모님 때문이 아니라 군가의 딱 한 소절이 너무 슬퍼서… 울었다. “이 곳이 내 집이다~” 공군가의 마지막 소절. 수료식에서 연습했던 대로 큰 목소리로 그 부분을 부르다 멈칫했다. 정말 갑자기 실존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당최 왜 여기가 내 집이지? 당연히 내 집 아닌데… 왜 내 집은 없어졌지? 그 생각이 들자 마자 눈물이 나더라. 난 왜 대체 빡빡이가 된 채로 다른 빡빡이들과 이 넓은 운동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걸까?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설상가상으로 그 다음 소절이 “내 목숨 건 곳”이다. 아니 왜 집에서 목숨을 걸으라 하는지? 집에서 목숨을 걸어본 적이 없는데.
자대는 충남. 대학교와 애인은 서울에 있고, 집은 광주. 네이버 지도 위로 삼각형을 그렸다. 휴가를 나오면 서울-광주-복귀, 광주-서울-복귀를 반복했다. 휴대폰은 자대 들어오기 전 마지막 행선지에 놓았다. 어디에도 내 공간은 없었다. 공간 비슷한 곳으로는 생활관 침대. 하지만 내가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여기가 내 집이라니 말도 안 된다면서. 광주 본가에서도 내 입지는 작아졌다. 뭐.. 맨날 들어오는 사람도 아니니. 동생에게 방을 뺏겼다. 옷은 하나하나 어딘가로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려니 했다. 당연히 나는 이 집에 계속 있지 못하니까. 그래도 서러웠다. 내 집 비슷한 공간은 싸그리 사라지고 있는 지금이 슬펐다.
이제야 대충,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집으로. 곧 다시 서울살이를 시작할 것이다. 이사를 하는 날이 올때, 가장 기쁠 것이다. 이제 건수만 있으면 무조건 도망쳐야지. 아무대도 안 나와야지. 너무 밖에서만.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