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종혁 Feb 14. 2019

(드디어) 집으로

그만 돌아다니고 싶다


16년 11월, 서울 자취방을 정리했다. 광주로 내려왔다. 입대가 12월이라 그래야만 했다. 정확히 그때부터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아주 조금, 딱 다리 뻗고 누울 수 있을 만큼의 공간만 제공되었다. 침상, 침대. 국방색 모포로 덮어놓은 공간까지만. 그 마저도 사방이 뚫려 다른 사람들과 많은 걸 공유해야만 했다. 새내기 시절 과 술자리가 재미없으면 눈치 보다가 기꺼이 집으로 도망쳤던 나에게, 자취방은 유일한 퍼스널 제국이자 대피소였다. 바깥이 가끔 너무 짜증나고 숨막혔던 내 유일한 취미는 집으로의 도망이었는데. 군대엔 그런 거 없으니, 난 밖에서만 살았다.  


훈련소 수료했던 날에 울었다. 근데 울게 된 포인트가 좀 웃기다. 군가를 부르다 울었다. 빡빡머리가 된 채로 온갖 고생을 했었던 설움이나, 오랜만에 본 부모님 때문이 아니라 군가의 딱 한 소절이 너무 슬퍼서… 울었다. “이 곳이 내 집이다~” 공군가의 마지막 소절. 수료식에서 연습했던 대로 큰 목소리로 그 부분을 부르다 멈칫했다. 정말 갑자기 실존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당최 왜 여기가 내 집이지? 당연히 내 집 아닌데… 왜 내 집은 없어졌지? 그 생각이 들자 마자 눈물이 나더라. 난 왜 대체 빡빡이가 된 채로 다른 빡빡이들과 이 넓은 운동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걸까?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설상가상으로 그 다음 소절이 “내 목숨 건 곳”이다. 아니 왜 집에서 목숨을 걸으라 하는지? 집에서 목숨을 걸어본 적이 없는데. 


자대는 충남. 대학교와 애인은 서울에 있고, 집은 광주. 네이버 지도 위로 삼각형을 그렸다. 휴가를 나오면 서울-광주-복귀, 광주-서울-복귀를 반복했다. 휴대폰은 자대 들어오기 전 마지막 행선지에 놓았다. 어디에도 내 공간은 없었다. 공간 비슷한 곳으로는 생활관 침대. 하지만 내가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여기가 내 집이라니 말도 안 된다면서. 광주 본가에서도 내 입지는 작아졌다. 뭐.. 맨날 들어오는 사람도 아니니. 동생에게 방을 뺏겼다. 옷은 하나하나 어딘가로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려니 했다. 당연히 나는 이 집에 계속 있지 못하니까. 그래도 서러웠다. 내 집 비슷한 공간은 싸그리 사라지고 있는 지금이 슬펐다.  




이제야 대충,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집으로. 곧 다시 서울살이를 시작할 것이다. 이사를 하는 날이 올때, 가장 기쁠 것이다. 이제 건수만 있으면 무조건 도망쳐야지. 아무대도 안 나와야지. 너무 밖에서만. 살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