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종혁 Mar 30. 2019

초딩때 이미 알게 된 것

적당한 거짓말은 인생에 도움이 된다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같은 반 친구들과 독서토론 모임 같은걸 했었다. 그룹과외 같은 형태로. 책 읽어오면 선생님 오셔서 나 포함한 초등학생 다섯명과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초딩들이 심도있는 이야기같은거 할 수가 없었고, 대신에 창의적인 사고 따위를 길러준다는 희한한 활동들을 했다. 그림도 그리고, 지금 내 기분을 글로 써보세요 이런 것도 하고.  


거기서 있었던 웃긴 일 하나. 선생님이 한번은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을 그림일기로 만들어봐라" 하셨다. 가장 오래된 기억을 그려낸 친구에게는 가방이랑 필통을 준다며. 나는 정말로  머릿 속 가장 오래된 기억이 무엇인지 생각을 더듬어보기 시작했다. 동생이 태어났을 때였던거 같았다. 한 두 살때쯤. 병원에 누워있는 엄마, 그리고 그 옆 TV에서 나오던 북극을 배경으로 한 썰매 애니메이션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이를 그렸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나는 두살 때 기억도 엄청 잘 난다고.  


근데 친구들의 기억력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한 친구는 자기가 난생 처음으로 말을 입 밖으로 뱉은 순간이 기억이 난다고 했다. "엄마! 배고파!"라고 했다고. 다른 친구는 태어났을 때 그 시점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갑자기 세상이 밝아졌어요! 또 다른 친구는 심지어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 기억이 난단다. 그림으로는 나름 자신의 태곳적 모습을 그렸다. 자고 있는 자신과 더불어 탯줄까지 그리는 디테일까지.  


속상했었다. 당연히 친구들의 그림일기는 개뻥이란걸 알았기 때문에… 어떻게 한 살도 안 되었을 무렵의 기억이 남아있단 말인가. 그런데 웃긴 건, 선생님은 의심하지 않았다. "와! 누구는 엄마 뱃속에 있었던 기억도 나는구나!" 하면서 가장 오래된 기억을 그림으로 그려낸 그 친구가 일등을 먹었다. 나는 말도 안된다며 항의했지만, 친구를 의심하면 안된다며 선생님은 결정을 바꾸지 않더라. 그래서 난 11살에 2살때 기억까지밖에 못하는 기억력 나쁜 어린이가 된 것에 더불어, 뭔가 패배했다. 집에 오면서 생각했다. 아, 나도 거짓말 칠걸. 나도 거짓말 쳐서, 정자였을 때 기억 난다고 그림일기 그리면 가방이랑 필통이랑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인생 스물 몇 년동안 온갖 경쟁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사회는 '공정한' 경쟁을 위해 온갖 규칙들을 제공해줬다. 모두들 이건 이렇게 해야한다, 이러면 안된다 같은. 나는 공정함을 믿는 편이었다. 규칙이 사람들을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만들었고, 열심히만 하면 그래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규칙의 허점을 알아내고, 비겁하더라도 정당한 반칙에는 무엇이 있을지 계속 생각한다. 결국 결과를 얻어내면, 그걸로 된 거였다. 사회도 대충 인정해 주더라. 백프로 공정한 경쟁이란건 친구들 그림일기처럼 개뻥이었다는 사실. 너무 천천히, 그러나 선연히 진실로 다가와서 나조차도 언제 깨달았는지 알아챌 수 없었다.  


어디에서나 공정한 경쟁을 무척이나 원하는 사람이지만...  솔직히 그때로 돌아간다면, 망설이지 않고 나는 수정체 시절 세포분열할 때의 기억이 난다며 우겼을 것이다. 어떤 아이는 적당히 치는 거짓말이 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