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를 읽다-『그래, 결심했어!』를 함께 읽고
『그래, 결심했어!』는 저학년 어린이들을 위한 인성 동화 시리즈이다. <절제>를 주제로 네 아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창기, 예솔, 유리, 동배 네 아이는 각각 참지 못하는 것이 있다. 창기는 게임을, 예솔은 화를, 유리는 욕심을, 동배는 음식을 참기 힘들다.
먼저, 인내심과 절제라는 낱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절제가 뭔 줄 알아?”
“지금 하고 싶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나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참는 걸 말해요.”
“맞아. 예를 들어 지금 소변이 마렵다면 굳이 참을 필요가 없겠지? 그런데 얄미운 친구를 때리고 싶다. 그럼 참아야겠지. 근데 참지 못하는 게 왜 자기한테도 피해를 주지?”
“보세요. 제가 친구를 참지 못하고 때렸다고 해봐요. 그럼 친구도 아파서 피해를 입겠죠? 근데 저도 피해가 있어요. 친구가 선생님한테 말하면 제가 혼나잖아요.”
“그렇구나. 또 참아야 하는 이유를 말해볼까?”
“게임만 계속 하면 나중에 중독이 될 수도 있어요.”
“계속 친구들한테 화내고 짜증내면 친구들이 나를 싫어하게 돼서 왕따 돼요.”
“유리처럼 남들 하는 거 부러워서 다 사면 용돈 다 써서 엄마한테 혼나요.”
“먹고 싶은 대로 다 먹으면 배탈 날 수도 있고, 뚱뚱해져서 건강이 나빠져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게임을 많이 한다고 모두 중독이 되는 걸까? 내 돈을 내 맘대로 쓰는 게 잘못일까? 뚱뚱하면 건강이 나빠질까? 뚱뚱함의 기준은 뭘까? 미래의 나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당장은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들은 미래의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서라면 지금의 나는 조금 불행해도 괜찮다는 생각에 굉장히 익숙해져 있다. 실제 행동하지는 않더라도 생각은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나중에 편한 직업 가지고 돈 많이 벌려면 지금 힘들어도 참고 공부해야 해.”
이런 생각을 굳이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강조해서 말해주지 않더라도, 살아가면서 아이 스스로 체화한다. 그러다보니 지금의 행복을 유예하는 것이 미덕인양 여기고 그게 당연하다 말하는 게 안타깝다.
프랑스의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첫 소설 ‘슬픔이여 안녕’에 이렇게 썼다.
“그 생활에는 생각할 자유, 잘못 생각할 자유, 생각을 거의 하지 않을 자유, 스스로 내 삶을 선택하고 나를 나 자신으로 선택할 자유가 있었다.”
그 선택에는 도박, 마약, 빈곤도 있었다. 그의 말 그대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 또한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초등 저학년 아이들에게 사강의 이야기를 해주기에는 난 아직 겁쟁이다. (중고등 수업에서는 한다. 자유의 범위에 대한 수업을 할 때 사강의 말을 인용한다.) 약간 돌려 이렇게 질문해본다.
“난 말이야. 음식 먹을 때 젤 맛있는 부분을 젤 나중에 먹거든.”
“저도 그래요!”
“붕어빵 먹을 땐 꼬리를 젤 나중에 먹고, 초밥 먹을 땐 새우 초밥을 젤 마지막에 먹어.”
“난 꼬리부터 먹는데.”
“난 내장(?)부터.”
“근데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 젤 맛난 걸 젤 나중에 먹으니까 배가 불러서 덜 맛있게 느껴지더라고. 배가 고플 때 맛있는 걸 바로 먹는 게 행복하지 않을까? 꼭 나중으로 행복을 미루고 지금 참아야 하는 걸까?”
아이들은 생각에 잠긴다. 책을 읽을 때는 무조건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이 엉뚱한 질문을 하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자기의 경험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다 한 아이가,
“선생님, 저는 참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면요. 맛있는 걸 먼저 먹어버리면 나중에 맛없는 건 남기게 될 수도 있고요. 식사의 마지막 기억이 안 좋게 남을 수도 있거든요. 근데 맛있는 걸 나중에 먹으면 전부 좋게 기억이 돼요.”
“맞다, 나도 그래.”
“저는요. 지금 행복하고 좋은 걸 해버리면요. 갈수록 더 큰 행복을 찾고 싶어질 거 같아요. 조금 참으면서 조그만 행복을 누려야 나중에 허무하지 않은 것 같아요.”
“쌤, 이런 얘기는 철학인 거 같아요. 사람마다 다 생각이 달라서 답이 없어요.”
“응,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언제 행복을 느낄지, 언제 참을지를 결정하는 것은 ‘나’고, 그 선택으로 인한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나’다. 절제가 늘 미덕이 아니듯, 무절제 또한 늘 부덕은 아니다. 그 선택의 기준이 그저 타인의 판단이거나 오래된 관습 때문이 아니길 바랄뿐이다. 아이들에게 왜 참아야 하는지 물어보면 가장 많은 답변이 ‘혼날까 봐, 놀릴까 봐’이다. (물론 정말 혼나야 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래도 아이들이다 보니, 또 판단의 주체가 되어본 경험이 적다보니 타인의 판단이 가장 큰 기준이 된다. 이런 경우도 진짜 절제라 말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만약에 엄마한테 혼날까 봐 안 하는 거면, 엄마가 없으면 또 하지 않을까요?”
“뚱뚱하다고 친구가 놀려서 살을 빼기로 하는 건 잘못된 것 같아요. 놀리는 사람이 나쁜 건데.”
“놀릴까 봐 참으면 나중에 쌓이고 쌓여서 폭발할 거예요.”
몇 년 전 처음 이 책으로 수업지도안을 만들 때만 해도 ‘절제가 미덕’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참아야 할 때와 참지 말아야 할 때를 나누고, 잘 참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 나누고, 등장인물들이 절제를 잘했을 때 10년 후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상상해서 글쓰기를 했다. 지금 보니 수업지도안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대가 바뀌었고, 내 가치관도 변했고, 그에 따라 질문도, 수업 구성도 달라져야 한다. 그래서 교재는 만들고 만들어도 끝이 없다.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