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NEWJEANS-HYPE BOY
내 지난날들은 / 눈 뜨면 잊는 꿈
Hype boy / 너만 원해
Hype boy / 내가 전해
“춤춰 본 적 있으세요?”
“아, 네. 어릴....”
“언니! 이 분 예전에 춤추셨대!”
“아! 아뇨...! 학교 다닐 때 소풍 가서 춤추고 그냥 다들 그 정도는 하시잖아요!”
“어? 우린 아닌데?”
처음 댄스 학원에 갔을 때 먼저 다니던 분들의 기습적 질문에 당황해서 한 대답 때문에 난 어디서 춤 좀 추다 온 사람이 됐다. 다들 소풍이나 학예회 때 춤추고 노래 불러 본 적 없나? 주변에 물어보니 생각보다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이 많았다. 내 주변 사람들이야 전부 앉아서 책 보고 글 쓰는 사람들이라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댄스 학원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과거를 더듬어 보니, 한 반에 50명이 넘는 학생들이 있는데, 그 아이들이 모두 무대 위로 뛰어들진 않았던 것 같다. 나처럼 나대는 애들이 늘 무대를 차지하고 있었지. 나는 대체 언제부터 그랬던 걸까?
가장 오래된 기억은 11살 무렵이다. 10살까지는 내가 학교에서 어떤 아이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4학년 때부터 성격이 매우 나빠져서 못된 짓을 많이 하고 다녔기에 기억이 강렬한 듯하다. 그때 나는 공부도 운동도 노래도 춤도 내가 제일 잘해야 하고, 친구도 가장 많아야 하는 욕심 많은 아이였다. 학교 행사에서 내가 항상 주인공이어야 했기에 장기자랑에도 꼭 나서야 했다.
당시 인기 있는 노래의 척도는 가요톱10에서 몇 주간 1위를 하는가였다. 5주 연속 1위를 하여 골든컵을 받은 노래는 꼭 내 차지여야 해서 장기자랑 때 나와 같은 노래나 춤을 선보이겠다는 아이가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못하게 했던 것 같다. 다리를 부러뜨려 놓았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내가 먼저 하겠다고 했잖아.”라고 우기거나 “너는 다른 노래(춤)를 더 잘하잖아.”라고 부추기거나, “다른 거 하면 떡볶이 사줄게.”라고 회유했던 것 같다. 아니면 아예 함께 하자고 하고 내가 가운데 선다거나. 워낙 기가 세다 보니 순한 친구들은 내 말에 거의 따라주었던 것 같다. (이 지면을 빌려 진심을 다해 사죄드립니다) 어쨌든 그렇게 초등 시절을 보내고 중학생이 되어서는 좀 달라지긴 했다. 스스로 나서지 못하고 떠밀려 나가는 식으로 상황을 만들었다. 나대기 부끄러운 줄을 드디어 깨달았나 보다.
가수들의 춤을 따라 하는 것 외에 춤이라고는 초등학교 운동회 때 단체로 추던 꼭두각시춤이나 부채춤이 다였는데, 중학교에 오니 ‘무용 시간’이 있었다. 주로 스트레칭과 기초 발레, 한국 무용을 배웠다. 나는 그 시간이 정말 즐거웠다. 지금의 나는 시간만 나면 가만히 누워서 몸놀림을 최소화하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지만, 어린 시절은 달랐다. 운동은 가리지 않고 좋아했으며, 국민체조조차 열과 성을 다했다. 너무 애국적인 마음으로 하다 보니 노래가 시작되고 ‘국민체조 시이작!’하는 외침이 들리면 울컥 안구가 흐려지기도 했다. 이렇게 그냥 몸을 휘두르는 것만 해도 좋은데 무용은 몸을 계획적으로 움직이고 게다가 무언가를 표현하고 의미 짓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한번은 무용 시험으로 조를 나눠 단체 퍼포먼스를 하게 했다. 열네 명이 한 조였고 나는 조장이 되었다. 클래식 음악이나 동요, 가곡 같은 음악시간에 배우는 노래로 하자는 조원들의 의견에 나는 과감히 대중가요인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를 선택했다. 내가 고른 노래인 만큼 안무와 동선, 의상과 소품까지 모든 것을 내가 기획했다. 대형 변화를 전부 그림으로 그려 복사해서 조원에게 나눠주고 다른 조보다 훨씬 연습을 많이 했다. 7명씩 나누어 한쪽은 빨강, 다른 쪽은 파란 옷을 입고 전쟁과 분단을 상징하는 퍼포먼스를 한 뒤 마지막에 태극 모양을 함께 만들면서 화합으로 마무리되는 안무였는데, 4개 조 중에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때 나를 눈여겨본 무용 선생님은 가을에 열리는 교내 무용대회에서 우리 반이 해야 할 부채춤 안무를 나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다른 반은 선생님이 돕고 연습도 시켰지만, 우리 반은 내가 선생님 역할을 다했다. 그 대회도 우리 반은 1등을 했다. 대회가 끝나고 무용 선생님은 내게 한국무용을 배워 볼 생각이 없는지 물었는데, 당시 무용을 한다는 건 너무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했다. 만약 그때 무용을 배웠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금세 그만두었을 것 같긴 하다. 내게 그 정도의 재능과 끈기가 없다는 걸 그때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중학교 3년을 제외하곤 창의적인 춤을 출 기회는 없었다. 중학교 졸업 이후로는 아예 춤을 출 일이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춤추고 싶다는 마음을 구석으로 구겨 넣었지만, 때론 도저히 참지 못하고 펼쳐 버린 적도 있다.
24살쯤 재즈댄스 학원을 몇 달 다녔으나 재즈댄스인지 방송댄스인지 알 수 없는 춤에 재미가 없어 그만두었다. 28살 때 남미를 3개월 정도 여행했는데, 그때 아르헨티나에서 탱고와 살사를 살짝 접했다가 “핫 뜨거!”하고 도망갔다. 파트너와 정열과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춤은 유교사상에 절여진 나에게 맞지 않았다. 그걸 깜빡 잊고 39살에 스윙댄스를 배우러 갔다가 파트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허둥대다 좌절하고 말았다. 그때 확실히 다짐했던 것 같다. 파트너와 추는 춤은 내 인생에서 영원히 퇴출!
발레를 배워볼까, 줌바 댄스를 할까, 벨리댄스를 해볼까 여기저기 기웃댔지만, 사실 내가 추고 싶은 춤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내가 안무를 짤 게 아니라면, 남이 만든 훌륭한 안무를 따라 하고 싶었다. 어릴 적 가수들의 춤을 따라 추며 느꼈던 행복을 지금 다시 느끼고 싶은 것이다. 딱히 케이팝 가수를 좋아해 본 적도 케이팝을 즐겨 듣고 따라 불러본 적도 없다만, 내게 있어서 케이팝은 그냥 어린 시절 티브이로 보고 들었던 내게 가장 익숙한 음악이다. 지금의 케이팝과 그 시절의 대중가요가 별 개의 장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가장 친숙하게 보고 듣는 노래에 맞춰 동경하던 그들의 퍼포먼스를 따라 하고 싶었다. 다른 춤으로는 그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난 춤을 추고 싶은 게 아니라 케이팝 댄스를 커버하고 싶은 것이란 결론을 내리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