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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휘찬 Aug 09. 2021

빠른게 무조건 좋은건가요

날아오지 마세요

로켓배송, 샛별배송, 달빛배송, 쓱배송 등 이름은 모두 다르지만 누구나 알만한 유통업체의 빠른 배송들이다. 보통 식품이나 공산품을 취급하고 주문한 다음 날이나 다음 날을 맞이하기도 전 새벽에 집 앞에 주문한 것들을 배송해준다. 다른 나라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시스템이다. 나 역시 그런 빠른 배송들의 혜택을 꽤나 애용했다고 생각한다. 자주는 아니지만 급하게 필요한 것들이나 오프라인으로 사러 가기 귀찮은 것들을 주문하고 편하게 현관문에서 받아봤다. 우리나라의 택배 배송도 꽤 빠르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보다도 훨씬 빠르니 이렇게 더운 날 굳이 돌아다닐 필요가 있을까 싶다. 내일 아침에 프렌치토스트가 먹고 싶은데, 지금 사러 가기 싫다면 어플로 주문하고 휴대폰으로 결제만 하면 된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 눈 비비며 현관문을 열어보면 산타의 선물(물론 내 돈 주고 산거지만)처럼 식빵과 버터가 놓여 있을 것이다. 얼마나 좋은 세상이란 말인가. 그런데 얼마 전 내가 주로 이용하는 인터넷 서점에서도 빠른 배송을 시작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다. 그 서점과 꼭 어울리는 이름의 '양탄자'배송. 내용을 보니 이전의 빠른 배송들보다 더 하다. 일단 다음 날이 아니라 당일에 배송을 완료하는 것으로, 오전에 주문을 하면 오후 6시 전에 배송해 준다는 이른바 '퇴근 전 배송'과 주문 시간에 따라  '자기 전 배송'이나 '출근 전 배송'으로 나뉘어 있었다. 물론 서울에서만 우선적으로 시작한 서비스이긴 하지만 이게 가능한 건가 싶었다. 분명 편리한 부분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 정도로 급하게 책이 필요한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싶기도 했다. 나는 한 달에 3~5회 정도 책을 주문하는 편인데, 대부분 문학 위주의 책들이고 오늘 당장 봐야 하는 급한 책들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 안 읽은 책도 많아서) 굳이 당일에 배송을 받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주문 시에 일반 택배 배송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하루는 여느 때처럼 책을 주문했다. 역시나 급한 것은 아니고 다음 날이나, 혹은 그다음 날에 받아도 상관없는 책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일반 택배 배송을 선택할 수는 없었고, 주문 시간 상으로는 '퇴근 전 배송'에 해당되어 6시 전에 배송된다는 안내를 받았다. 퇴근 전에 배송될 확률이 9X%라며 제시간에 배송되지 않을 가능성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는 듯했지만 그 마저도 빠른 배송의 성공률을 자랑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날 내가 주문한 책은 퇴근 전 (엄밀히 말해서 출근을 안 했으므로 퇴근 전은 아니지만) 배송이 되지 않았다. 저녁 9시가 넘어서 도착한 것 같다. 물론 이 정도의 배송도 놀랄 만큼 빠른 배송이고,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그 책이 급하게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속은 느낌이 들었다. 굳이 퇴근 전에 배송해 준다고 하더니 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한단 말인가, 그럼 거짓 광고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배송 후기에 보란 듯이 적었다. '제시간에 오지 않았습니다. 6시까지 배송된다고 하더니, 10시가 다 돼야 오네요.' 


그 이후로도 여러 번 책을 주문했지만, 도착 시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당일에 받는 것도 엄청나게 빠르고 불편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매불망 책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고, 외출하고 돌아오거나 자고 일어나면 책이 배송되어 있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또 책을 주문하게 되었는데 그날의 주문도 '퇴근 전 배송'에 해당되었다. 14~18시 도착 예정이라고 자랑스러워하는 느낌이었는데, 책은 밤이 늦도록 도착하지 않았다. 또 속은 것 같긴 했지만 급하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이런저런 일들을 하다가 책이 배송되었으면 현관문 앞에 두지 말고 집에 들여놔야겠다는 생각으로 어플을 확인했다. 그때 시각이 1시 18분이었는데 어플을 확인하니 '1시 16분 배송 완료'라고 되어 있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며 현관문을 열었는데, 말 그대로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배송기사님과 마주치게 되었다. 아마 올라오시기 전에 완료 처리를 하시고 올라오신 듯했다. 나는 일단 놀라기도 했지만 배송기사님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다. 누군가의 아버지인 그분은 머리가 하얗게 될 정도로 나이 드신 분이었고, 한 밤중에도 더운 날씨에 땀에 절어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그날 언제부터 배송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퇴근 전에, 자기 전에 배송을 해야 된다는 압박감으로 배송을 하셨을 테고 결국 6시 전에 배송해야 될 내 책을 가지고 새벽 1시가 넘어서 도착하신 거였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 외에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밤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전에 남긴 배송 후기가 마음에 걸렸다. '제시간에 오지 않았습니다. 6시까지 배송된다고 하더니, 10시가 다 돼야 오네요.'라는 나의 메시지가 그분께 또 다른 부담이 되지는 않았는지 걱정스러웠다.


나도 알고 있다. 빠른 배송 덕분에 그분은 직업을 갖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건당 수당을 받는 직업이므로 그분은 더 많은 주문건수를 채우고자 하셨을 수도 있다. 책을 주문한 것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을 것에 대한 불만의 메시지를 남긴 것이 내가 그분에게 미안할 일도 아니고, 그분을 보며 함부로 마음을 쓰는 것은 무례한 일 일수도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기사님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빠른 게 좋은 거고, 내일보다는 오늘이, 낮보다는 새벽이, 새벽보다는 전날이 좋다는 생각 때문에 급하지 않은 물건을 급하게 배송해야 된다는 사실이, 빠른 배송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누군가를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낮과 밤을 바꿔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어느샌가 '양탄자 배송'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달빛' 내리는 밤에

'로켓'을 타고 '샛별'에 갔다가

'양탄자'를 타고 '쓱' 오지 마세요.

날아오지 마세요. 천천히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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