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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휘찬 Aug 12. 2021

내 마음의 풍금

내 영화의 한 장면

얼마 전, 종로에 있는 서울극장이 영업을 종료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2021년 8월 31일까지 영업 후 문을 닫는다는 기사였다. 서울극장에서 영화를 본 건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일이지만, 고등학생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그 시기에는 종로에서 영화를 많이 봤다. 피카디리, 단성사, 허리우드 같은 종로의 유명한 영화관 중에서도 특히 서울극장을 많이 이용했는데, 그중 가장 신식이었고, 깔끔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많고, 집 근처에도 3대 메이저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골고루 있어서 굳이 영화를 보기 위해 종로에 가야 할 필요가 없지만 90년대 중후반에는 종로에 가야 제대로 된 극장이 있었다. 지금처럼 앱으로 예매하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극장에 가서 바로 시작하는 영화의 자리가 없으면 다음 타임의 영화를 예매하고 종로에서 시간을 때우곤 했다. (이렇게 말하니 굉장히 오래된 이야기 같지만 그리 오래된 이야기는 아니다.) 


서울극장에서 본 영화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를 꼽으라면, <내 마음의 풍금>이라고 할 것이다.  17살의 늦깎이 초등학생 (전도연)과 새로 부임한 선생님 (이병헌)의 풋풋한 사랑이야기였는데,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전도연의 초등학생 역할이 화제가 되었던 영화다. 이 영화가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는 처음 동생을 데리고 영화관에 가서 본 영화이고 그날이 동생에게는 영화관 첫 경험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동생과 나는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편이다. 지금 검색해보니 이 영화가 1999년에 개봉을 했는데, 손가락을 접어가면 계산해보면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동생은 초등학교 6학년인 해였다. 나는 이미 여러 번 극장에서 영화를 본 적이 있었으나, 한 번도 극장에 가보지 않았던 동생에게 극장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마음으로 서울극장에 데려갔던 게 기억이 난다. 당시 이 영화는 꽤나 잘 나가는 중이어서 1, 2층으로 된 대형 상영관에서 상영을 하고 있었고 우린 2층의 중간쯤에서 영화를 보았다. 집에서 '주말의 명화'나 보다가 극장에 처음 갔으니 얼마나 신기했을지. 영화도 물론 재미있었지만, 극장에서 처음 보는 영화에 푹 빠져서 깔깔대고 웃는 동생을 보며 흐뭇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때는 훗날 머리가 커진 동생이 나보다 더 잘 놀고 다닐 줄은 몰랐다.


서울극장이 문을 닫는다는 기사를 본 날, 동생에게 기사 링크와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나 : 저기 한 번 다녀와야 하지 않겠니

동생 : 저기가 혹시 풍금?

나 : 꼬꼬마 데리고 인생 첫 영화 보여준 게 엊그제 같은데

동생 : 2층 맨 뒷자리를 잡아가지고 TV보다 작게 보이더라

나 : 그건 기억의 왜곡이야, 너 교실에 전도연이랑 같이 앉아있는 학생처럼 깔깔댔어.

동생 : 내 기억은 그래


괘씸하다.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그래도 저렇게 왜곡하다니. 게다가 감성까지 무참히 파괴하고. 하지만 그 20년 동안 나도, 동생도 그리고 세상도 참 많이 변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신문에서 TV 편성표를 확인하며 주말의 명화를 기다리는 시대가 아니고, 넷플릭스나 왓챠로 언제든 보고 싶은 영화를 대부분 볼 수 있다. 극장에 가지 않더라도 그 시절보다 훨씬 큰 TV나 빔 프로젝터로 나만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고, 어플로 영화를 예매하므로 매진될까 봐 종종거리며 극장에 가는 일도 이제는 없다. 그 사이의 우리는 수십 편도 더 되는 영화를 보았을 것이고, 시대만큼이나 스펙터클하게 변해가는 영화에 어느새 적응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전도연만큼이나 풋풋했던 동생의 모습을 간직한 극장도 이젠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추억이 깃든 무언가를 

계속해서 잃어버리는 일인가 보다.

하지만 추억만큼은

나만의 영화가 되어

오래도록 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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