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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휘찬 Oct 17. 2019

코노에 빠지다

나는 음치가 아니에요

코인 노래방이 아니라 그냥 노래방이던 시절.

나는 노래방이 너무 싫었다.

어쩔 수 없이 노래방에 가야 할 때에는

다리 위로 계속 올려지는 마이크와 노래 번호 책 (요즘은 다 리모컨으로 하지만..)을 끝까지 이겨내고

탬버린이나 좀 흔들다 나오는 게 전부였다


나는 음치였던 걸까.

집에서 혼자 노래를 흥얼거릴 때 보면 음치는 아닌 것 같은데

노래방에서는 안 좋은 추억만 가득하다.

노래방에 가면 가수 못지않게 멋지게 노래를 부르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는 남자가수들이 부른 노래에 키가 맞지 않았다.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다 보면 음을 잡지 못해서

위, 아래로 롤러코스터 타듯 음을 맞추다가 노래가 끝나곤 했다.

이 모습은 마치 마치 <고음불가>의 이수근 같았다.

다른 친구들의 기억엔 나는 그냥 '음치'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나는 절대 음치가 아니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여자 가수의 노래는 곧 잘 불렀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학원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게 된 적이 있었다.

남자, 여자 아이들이 다 같이 노래방에 가게 된 터라 나는 싫다고 할 수가 없었고,

남자가수의 락발라드 노래를 멋지게 부르는 친구들 사이에서

여자 가수의 노래를 부르는 건 더더욱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난 또 박수나 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근데 한 친구가 내가 평소에 즐겨 듣던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끝까지 빼면서 노래를 부르지 않는 나를 위해 그 노래를 나 몰래 예약해뒀다.

남의 사정도 모르고.

나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 음을 맞추지 못했고

여자 사람 친구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것 같아서 한껏 화가 난 채 집에 돌아갔다.

지금 생각해도 속상하다.


성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니 노래방에 가서 무조건 버틸 수 없을 때가 있었다.

한 곡 정도는 불러야 하는데 웬만한 남자가수의 노래는 안되니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열심히 찾다가 알게 된 노래는

거미의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 항상 이 노래를 불렀다.

적당히 중성적인 노래이기도 했고 키도 잘 맞았다.

내가 이 노래를 부르려고 하면 꼭 남자 키로 바꿔주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곤란할 때도 있었지만

위기 모면용으로 잘 부르던 노래였다.


코인 노래방이 유행하면서 노래방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또 떠올랐다.

노래방은 나와는 상관없는 장소였는데 우연한 기회에 코인 노래방에 가게 됐다.

물론 이 때도 나는 박수나 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와 함께 코인 노래방에 간 친구는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고

음악을 하던 친구답게 내가 키를 찾아 헤매는 동안 나의 키를 찾아주었다.

나는 내가 원하던 남자가수의 노래를 너무도 편하게, 내 목소리로 불렀다.

그렇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남자가수의 노래를 적어도 3~5 키 정도 올려야만 편하게 부를 수 있었다.

여자 가수의 노래가 더 편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던 것.

근데 변성기 지난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경우가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때부터는 나에게 노래방은 더 이상 금기 장소가 아니었다.

퇴근하고 혼자서 노래를 부르고 오기도 하고

너무 좋은 노래가 있으면 키를 맞춰 여러 번 부르면서 연습도 한다.

이제야 노래방 가는 재미를 알게 된 것이다.

아니, 너무 심하게 알게 됐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코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 그대로 '중독'인 것 같다.

이렇게 변화된 나의 모습을 보니 어색하기보다는

이제야 나의 가창력(?)을 빛낼 수 있는 것 같아서 무척이나 기쁘다.

그동안 노래방에서 부르고 싶었던 노래를 실컷 부를 수 있어서 행복하다.

농담으로 슈퍼스타 K나  프로듀스 101에 나간다는 이상한 소리를 할 정도다.


안 좋은 기억으로 가득했던 노래방에서 20여 년 만에 딱 맞는 키를 찾게 되어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참 재미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자신이 가진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남들과 달라서 좌절할 수도 있고 혹은 못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것이라 노력 없이 잘만 되는데,

나는 그것조차 없는 것 같아서 낙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나와 키가 맞지 않는 노래를 부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의 노력이나 누군가의 도움 같은 기회를 만나서

나에게 딱 맞는 키를 찾게 되면

그 누구보다 신나게 그것을 즐길고 뿜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나는 음치가 아니라고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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