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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휘찬 Feb 05. 2021

어린 시절이라는 책갈피

책장은 넘어갔지만 책갈피는 꽂혀있어요.

천호대교 북단, 광장사거리.

정지신호에 멈춰 서 있던 봉고차 한 대가 있었다.

아빠는 운전석에, 갓난쟁이 동생을 무릎 위에 앉힌 엄마는 조수석에 앉아있었다.

나는 한 4-5살쯤 됐을까.

모든 좌석의 등받이를 뒤로 젖혀놓은 봉고차 뒷좌석은 언제나 내 놀이터였다.

뛰어다니고 굴러다니며 놀다 보니 젖힐 수 없는 맨 뒷좌석의 등받이 너머로 많은 책들이 보였다.

그중에 알록달록 예쁜 표지의 책은 무슨 내용인지 몰라도 참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책을 꺼내기 위해 등받이에 배를 댄 채 등받이 뒤로 허리를 잔뜩 숙였다. 

그 순간, 신호가 바뀌었고 차는 출발했다.

아슬아슬 배를 기대고 있던 나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고 

그 충격으로 열린 뒷 문을 통해 도로 한복판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곳은 지금도 아주 넓은 도로인데, 그때도 왕복 10차선은 되었던 것 같다.

굉장히 어이가 없는 상황이지만, 바로 뒤에 있던 차로써는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막 출발하던 찰나에 하늘에서 책과 함께 뚝 떨어진 아이라니.

하지만 여기서 더 황당한 건

아빠와 엄마는 내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신나게(?) 달렸다는 사실이다.

한참 달리다 뒤가 서늘해서 보니 뒷 문은 활짝 열려있고, 애가 없었다는 거다.

'하늘에서 책과 함께 떨어진 그 아이'는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무슨 생각이었는지 같이 떨어진 책을 질질 끌고 차가 쌩쌩 달리는 그 넓은 도로를 가로질러

길가에 가서 엉엉 울었다.

애 떨어진 뻔한 게 아니라, 애가 진짜 떨어진 아빠, 엄마는 

한참이 되어서야 나를 찾으러 왔고

뒤 쪽에 있던 차주들은 내 걱정을 하며 길가에 흩어진 책을 주워다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한 순간이 여러 번 있었던 사건이다.  

달리던 (정확히 말하자면 달리기 시작한) 차에서 떨어져 죽을 뻔했지만 

이 날이 내가 기억하는 나와 책의 짜릿했던 첫 만남이 아닐까 싶다.


트렁크에 책이 잔뜩 실려 있던 이유는 

당시 부모님이 서점 개업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어디선가 책을 받아오던 날이었다.

그렇게 준비해서 시작한 작은 동네 서점.

내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그 작은 서점에 책갈피처럼 꽂혀있다.

아빠, 엄마는 내가 마음껏 책을 읽도록 놔두셨다.

그래서 언제나 나에게는 책이 있었다.

서점의 가장 끝 책꽂이 한 칸을 다 비우고,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채웠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책을 한 권 읽고 나면, 또 다른 책을 채웠고

그래서 내가 읽을 책은 항상 가득가득했다.

그 칸에 있는 책이 내가 읽기도 전에 팔리면 한참 동안 서운했던 기억이 난다.

학교가 끝나면 나는 항상 서점 어딘가에 앉아 책을 꺼내 읽었다.

가끔은 만화책을 보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책을 읽기도 했다.

그 서점은 작고 허름했지만 나에게는 집이었고, 도서관이었으며, 학원이었고, 놀이터였다.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할머니였고, 흥미진진한 드라마였다. 

그때 읽은 책들이 어떤 책이었는지, 무슨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시간의 페이지는 한참을 넘어갔고, 그 서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에 있건 E-Book을 사면 지금 당장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지금도 나는 종이책을 사랑하고 열심히 책을 산다.

이미 책꽂이는 더 이상 꽂을 자리 없이 그득그득하고 

베란다에는 책을 담아둔 상자가 몇 개씩이나 있지만 언제나 사고 싶은 책이 넘쳐난다.

책을 둘 자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버릴 수 없으니까, 아니 책은 버리면 안되는거니까 

항상 이번 달은 책을 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그 다짐은 책 앞에서 언제나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다음 달이 되면 슬쩍 다시 나타난다.  

나의 책 욕심은 서점의 모든 책이 내 것 같았던 기억 속의 어딘가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의 책을 갖고 싶다는 마음. 어린 시절의 그 서점 같은 서재를 갖고 싶다는 마음.

그 서재에 앉아 책을 읽으면 

책 위에 뽀얗게 앉아있던 먼지가, 쾨쾨한 책의 냄새가, 옆 집에서 들러오던 피아노 소리가 

느껴질 것만 같다.

그리고 거기에 내가 쓴 책이 한 권 꽂혀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하늘에서 책과 함께 떨어진 아이는 

책 덕분에 크게 다치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았고,

인생이라는 책에서 어린 시절이라는 책갈피가 꽂힌 그 페이지를

언제든지 펼쳐 볼 수 있는 행복을 한참 동안 누리게 되었다.

그래서 책을 아끼고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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