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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Dec 02. 2024

동토(凍土)

안산자락길은 아직도 눈세상이다. 어느 정도 눈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눈이 많을 줄은 몰랐다. 자락길 진입로의 계단과 데크길에 눈이 가득하다. 내려오는 사람도 조심스럽게 난간을 잡고 내려오고, 올라가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눈을 치우는 사람도 있다. 아마 구청 직원인 것 같다. 그들은 주말에 눈을 치우고, 우리는 눈이 쌓인 안산자락길을 걷는다. 그분들에게 괜히 미안하다. 예전에는 눈이 오면 강아지처럼 마냥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습설로 눈의 무게가 가중되며 시장 지붕이 무너졌다. 평생 시장에서 생계를 이어가던 상인들의 앞길이 막막하다. 50중 추돌 사고도 났고, 큰 나뭇가지도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전선이 끊어져 단전사태도 발생했다. 사람과 자연 모두 눈으로 인해 큰 고통을 받고 있다. 그들의 고통이 나의 아픔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뉴스를 보며 저절로 한숨을 쉬기도 한다. 그들이 하루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길 기원한다.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강 건너 불구경할 때는 지난 것 같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들의 상황은 관심 밖의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들의 고통과 즐거움이 나의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나의 것들 역시 그들의 것이 된다. 세월의 흐름 덕분에 나와 너의 벽이 무너져내리며 만들어진 현상이다. 나의 행복은 그들에게 전달이 되고 그들의 고통은 나에게 전달이 된다. 그러니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잘 살라고 얘기할 필요가 없다. 내가 잘 살면 그들이 잘 살게 되는 것이다. 물론 같은 하늘 아래에 살면서 남의 고통을 모른 척할 수는 없지만, 적절한 선에서 그들을 위해 할 일을 한 후에는 자신의 삶을 살펴야 한다. 자신의 삶은 엉망이면서 남의 삶을 돕는다며 봉사가 아닌 오지랖을 넓게 펼치는 사람도 많다.      


요즘 자신에 대해 자주 많이 느끼면서 알아가는 것이 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남과 같이 있을 때 말하기보다는 듣는 것을 좋아하고, 같이 있는 것도 어느 정도 이상 시간이 지나면 무료해진다. 두세 명이 모여 얘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고, 여러 명이 모인 곳에는 말을 하는 것보다는 듣는  편이다. 전에는 나의 이런 모습이 사회성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라는 고민을 한 적도 있었다. 그냥 나의 성향일 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화 내용의 대부분이 나의 관심 밖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더욱더 말을 하지 않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 중 또 한 가지는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단 한 가지도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방면에 참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 그러니 할 말도 없고 말을 조심할 수밖에 없다. 조금 안다고 아는 체하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기도 한다. 조금 아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만 못하다.    

 

내가 아는 분야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걷기에 대해서 나만의 작은 견해는 갖고 있다. 많이 걸었고 계속해서 걷고 있다. 경험이 있기에 견해를 밝힐 수 있다. 10년 이상 글쓰기를 하고 있다. 밥 먹듯 일상이 된 취미 수준의 글쓰기다. 남에게 글쓰기에 대한 강의를 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가 글쓰기에 대해 얘기를 한다면 잘 들을 수 있는 귀와 마음을 갖고 있다.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세월은 오래되었지만, 경전 공부나 수행을 제대로 하지는 못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조금 구경만 했을 뿐이다. 그러니 남에게 불교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면 지옥고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주변에서 불교에 대해 얘기를 하면 듣거나 나의 소견을 밝힐 수는 있다. 견해일 뿐이지, 그 견해가 맞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종교와 같은 중요한 얘기를 함부로 아는 체하며 말할 수는 더더욱 없다. 상담공부를 했고 자격증도 취득했지만 상담 전문가라고 얘기할 수도 없다. 대신 잘 들을 수 있는 귀와 마음을 갖고는 있다. 그러니 가능하면 말을 줄이고 듣는 것이 편하다.      


요즘 안거를 하며 자신을 살핀다.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이 그다지 편한 편은 아니라는 사실을 점점 더 알아가면서 자애심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그들의 고통이나 행복을 일부분 느낄 수는 있을 정도에 불과하다. 가끔 가족이나 지인들과 통화를 할 때 용건만 얘기하고 빨리 끊는 편이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며 아내는 너무 사무적이고 정이 없다고 한다. 또한 형제들도 가끔은 서운함을 표현하기도 한다. 사랑과 따뜻함을 나누고 받는 것이 익숙하지 못한 사람인 것 같다. 한편으로는 사랑받기를 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해한다. 주는 것도 불편하고, 타인이 너무 가깝게 접근하는 것도 불편하다. 가장 쉽게 얘기하면 각자도생이 가장 편안한 사람인 거 같다. 나이 들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한다. 걷기 학교를 운영하는 것도 동호회 활동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다.      


안산자락길을 걸으며 나의 마음속은 여전히 안산자락길에 쌓인 눈처럼 얼어있는 동토(凍土)라는 생각을 해본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이 동토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식하게 되면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 동토를 녹이기 위해서는 햇빛이 필요하다. 햇빛은 따뜻한 마음이다. 나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이 ‘따뜻한 마음’이다. 안거는 자발적 고독과 수행을 통해 자신의 마음밭을 가꾸는 일이다. 가꾸기 위해서는 지금의 상태를 확인해야만 한다. 나의 마음은 얼어있다. 하지만 그 언 마음은 실제 나의 마음이 아니다. 과거의 경험과 생각이 만들어 낸 허상이다. 허상은 꿈에서 깨어나면 저절로 사라진다. 하지만 너무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만들어지고 굳어진 허상은 안산자락길에 쌓인 눈처럼 쉽게 녹지 않는다. 눈 한 송이는 쉽게 녹을 수 있지만, 오랜 세월 쌓인 설산은 쉽게 녹지 않는다. 눈을 녹이는 햇빛처럼 마음의 동토를 녹이는 작업이 필요하다. 동안거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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