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생은 희극입니다

by 걷고

오랜만에 여유롭게 걷습니다. 단출하게 세 명이 걷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조용히 침묵 속에 걷습니다. 굳이 침묵 걷기 시간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저절로 자연스럽게 침묵을 유지하며 걷게 됩니다. 오랜만에 찾은 서울 둘레길은 늘 그렇듯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왔다 갔다 할 뿐입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는 또 가족은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가깝게 지내다가 멀리 거리를 두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의 장난이 만들어 놓은 틀에 갇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틀과 부딪치며 언젠가는 틀을 부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 의지를 포기한 순간 자신의 주인을 포기하게 됩니다.

옆에 삼대가 모여 오순도순 얘기를 하며 식사를 합니다. 아버지, 아들, 손녀, 세 사람이 함께 걷고 음식을 먹습니다. 참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 저도 언젠가는 제 손녀와 서울 둘레길을 완주하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네 분의 수녀님이 걷고 있습니다. 이들의 걸음은 우리와 같지만, 그들은 순례를 하고 있고, 우리는 걷고 있습니다. 순례와 걷기는 걷는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마음속에 무엇을 지니고 걷느냐에 따라 구별됩니다. 어쩌면 비수행자인 우리의 걸음이 더 순례와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쉬기 위해 걷습니다. 쉬면서 자연을 찾고, 신을 찾고, 자신을 성찰하고, 자연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걷기 역시 순례입니다. 굳이 수행자와 비수행자를 나누는 것 자체가 어리석을 따름입니다. 수녀님들의 발원이 원만 성취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땡땡이치는 마음으로 걸었습니다.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코스를 이탈해서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쉬기도 했습니다. 2코스까지 걷기로 했지만, 생맥주가 당겨서 2코스 중간에 마치고 생맥주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가끔 하는 일탈은 틀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줍니다. 다만 일탈이 일상이 되는 것만 주의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일탈을 합리화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이는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오늘의 일탈은 그런 면에서 매우 안전한 그리고 건전한 일탈입니다. 저만의 생각일 뿐이겠지만, 그럼에도 저는 그렇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생맥주 마시며 인생을 얘기합니다. 살아온 얘기를 하고 듣습니다. 세 명이 모이니 집중이 잘됩니다. 말하는 사람도 집중해서 얘기하고, 듣는 사람도 집중해서 듣습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멀리서 보면 모두 희극일 뿐입니다. 하지만 지금 현실이 괴롭기에 비극으로 느껴질 뿐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 괴로움 자체가 행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게다가 괴로움의 원인도 자신이 만들었고, 그 괴로움이 자신을 정화시키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행복한 웃음을 짓습니다. 오늘 우리는 모여서 함께 걷고 얘기를 나누며 인생은 희극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습니다. 오늘 좋은 시간을 만들어 준 두 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인생은 희극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욕심이 불러온 해프닝